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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태조 고황제 유방'''(漢 太祖 高皇帝 劉邦, [[기원전 247년]] 혹은 [[기원전 256년]] ~ [[기원전 195년]] 6월 1일)은 [[전한]]의 초대 [[황제]](재위: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95년]])로, [[자 (이름)|자]]는 '''계'''(季)이다.
 
패현(沛縣)의 정장(亭長)<ref>정(亭)이란 당시 일정 거리마다 배치되어 있었던 역소의 일종을 가리킨다.</ref>으로 있다가 [[진나라]]에 맞서는 봉기에 가담하고서 진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한때는 [[관중]](關中) 땅을 지배 아래 두었다. [[항우]](項羽)에 의해 [[기원전 206년]] 서부 한중(漢中)에 좌천되어 한왕(漢王)으로 봉해졌으나, 동진하여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에서 항우를 토벌하고 전한을 세웠다.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고황제(高皇帝)이며, 일반으로 [[한고조|고조]](高祖)로 불린다.<ref>원래 유방은 고제(高帝)라고 불러야 올바르지만, [[사마천]]이 [[사기 (역사서)|사기]]에서 '고조'라고 칭한 이래 이 호칭이 주지됐다.</ref> 고조는 군현제와 봉건제를 병용한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무위]]를 숭상한 유학자 [[육가]]의 영향 속에서 무위를 실행하며<ref name="김덕삼 한대 도가 사상">김덕삼 [https://circ.jams.or.kr/po/volisse/sjPubsArtiPopView.kci?soceId=INS000007785&artiId=SJ0000000144&sereId=SER000000003 ‘변화’와 ‘장’을 통한 한대 도가 사상의 고찰: 황로학을 중심으로] 국민대학교 중국지식네트워크 13권13호 (2019년5월) 231~256쪽 {{doi|10.35389/ckn.13.13.201905.231}}</ref> 한고조 유방은 [[도교]] 정신을 매우 중시하였고,<ref>{{뉴스 인용|url=http://www.seniorsinmun.com/news/articleView.html?idxno=2381|제목=유교, 한무제 그리고 정도전|날짜=2016-01-15|출판사=시니어신문|확인날짜=2021-06-27|archive-date=2021-06-27|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10627172746/http://www.seniorsinmun.com/news/articleView.html?idxno=2381|url-status=}}</ref> [[황제]]와 [[노자]]를 지칭하는 황로사상을 이용하여 나라를 다스렸다.<ref name="김덕삼 한대 도가 사상"/>
 
[[사마천|사마천(司馬遷)]]은 [[진나라|진나라(秦)]] 말 전쟁이 많아 사회가 혼란하였으나 유방(劉邦)은 전략가 [[장량|장량(張良)]]의 여유와 노련한 경영으로 마침내 [[한나라|한나라(漢)]]를 건국하는데 성공하였다라성공하였다라고 평했다.
 
== 생애 ==
=== 탄생 ===
유방은 패군(沛郡) 풍현(豊縣)의 중양리(中陽里),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강소 성]](江蘇省) [[서주 시쉬저우시]](徐州市) 패현(沛縣)에서 아버지 [[유태공]](劉太公)과 어머니 유온(劉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 [[유백]]·[[유희 (대경왕)|유희]]가 있었고 아래로 이복 동생 [[유교 (초원왕)|유교]]가 있었다. 유방의 출생년을 두고서는 추측이 두 가지가 있다.
 
유방의 어머니 유온이 유방을 낳기 전에 어느 연못 옆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몸 위에 붉은 용이 올라오는 꿈을 꾸고서 유방을 낳았다고 한다.{{출처|날짜=2013-06-16}}<ref>이 탄생설에 관해선 유력한 설 한 가지가 있다. 유방이 자기의 형제들과 아비인 태공과 다르게 성격이 유난히 괴팍했다는 점과 다른 왕조들의 시초와 다르게 삽입한 용 설화로 말미암아 유방의 어머니 유온이 연못으로 축제로 갔다가 산적의 습격으로 인해 산적들에게 잡혀서 강간당해 낳은 것이 유방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당시 백성이 축제를 자주 나갔으며, 그런 여러 축제에 산적이 습격하는 일은 허다해서 신빙성이 있으며, 일부러 '붉은 용'을 쓴 점은 용과 같은 유방의 아비를 뜻하면서도, 성격과 모습이 무서운 산적을 뜻하여 일부러 용을 붉다고 표현한 것이라 한다.</ref> 유방의 이름인 '방(邦)'은 《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후한]]의 학자 순열(荀悅, 148년 ~ 209년)이 지은 편년체 역사서 《한기(漢紀)》에 된 기록을 후세 학자들이 《사기》, 《[[한서]]》에 주석하면서 한 인용으로, 발굴된 유물 자료들로써 대체로 옳다고 간주되며, 자(字)인 계(季)는 '막내'라는 뜻이다.<ref>또한, 유방의 부모명도, 부 '태공'은 나이 지긋한 남자를 부르는 일반 호칭이고 모 '온(실제 성은 미상)'도 마찬가지로 '아주머니'와 같은 일상 호칭이며, 유방의 큰형인 백(백은 자이다)의 이름도 '장남'이라는 뜻이다. 즉 유방 일가의 본명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고 사마천이 《사기》를 쓰면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명에 그냥 이런 간단한 단어를 붙여버렸다는 설도 있으며, 당시 중국에서 서민은 정식 이름을 쓰지 않고 '유백 = 유씨 댁 큰아들'이나 '유계=유씨 댁 막내' 정도로만 불렀다는 설도 있으나 손윗형이나 이복 동생의 명은 각각 '희', '교'가 전해지는 형편으로 보아, 일가 전원의 명이 불명인 것은 아니고 당시 피휘(避諱) 관습 때문에 일부러 모호하게 적었다는 설도 전한다.</ref>
 
유방은 코가 높고 수염이 아름다워 소위 '용안'이라 불리는, 긴 얼굴에 코가 돌출된 듯한 얼굴이었으며 넓적다리에는 반점 72개가 있었다고 한다(72라는 숫자는 1년 360일을 오행사상의 5로 나눈 숫자로서 당시로서는 상당히 길한 수였다).
 
=== 진시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협객 ===
=== 생애 초기 ===
{{참고|아방궁}}
진 말기 농민 반란에 가담하기 전의 유방은 소위 '협객(狹客)'으로서, 가업은 뒷전이고 주색에 빠져 살고 있었다. 연고지인 패동(沛東)에 있던 사수(泗水)의 정장(亭長, 지금의 파출소장)으로 취임한 뒤에도 성실하게 임무에 임하지는 않았다. 이때 유방과 함께 일했던 패의 관인 중에는 후일 유방의 패업(覇業)을 도울 [[소하]](蕭何)와 [[조참]](曹參)도 있었지만, 이들도 아직까지는 유방을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는데도 유방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고 하는 일이 실패해도 주위에서 옹호해 주었으며, 술집에 들어가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여 가게가 가득 찼고 이 시기에 [[장이]](張耳)의 식객(食客)으로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출처|날짜=2013-06-16}}
 
어느 날 부역 문제로 함양에 간 유방은 그곳에서 [[시황제]](始皇帝)의 행차를 보게 되는데 "사내대장부로 태어났으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고 중얼거렸다고 한다.<ref>{{뉴스 인용 |url=https://www.dnews.co.kr/uhtml/view.jsp?idxno=201701171438185390913|제목=‘금수저’ 항우를 이긴 ‘흙수저’ 유방의 리더십|날짜=2017-01-18|출판사=e대한경제}}</ref> 이것은 항우가 똑같이 시황제의 행렬을 보며 "저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말겠다."{{출처|날짜=2013-06-16}} 라고 중얼거렸다는 일화와 곧잘 대비되어 전자는 황위를 동경, 후자는 증오를 의미하며 유방과 항우의 극명한 성격차를 드러내는 사례로 인용된다.
 
=== 유명인사의 사위가 되는 행운 ===
한번은 선보(單父, 산동 성) 사람인 [[여선왕|여공]](呂公)이 자신의 원수를 피해서 유방이 있는 패로 왔는데 당대 명사였던 여공을 환영하는 연회가 열리고 소하가 이 연회를 관리하게 되었다. 패의 사람들이 각각 선물과 돈을 갖고 모였는데 아주 많은 사람이 모여 자리가 부족할 지경이 되자 소하는 가지고 온 선물이 1천 전(錢) 이하인 사람은 땅에 앉도록 했다. 이에 유방이 와서 자신은 전 1만 전의 선물을 가져왔다며 여공에게 전했고 여공이 놀라 문까지 나아가 유방을 맞이하고 상석에 앉혔지만, 유방이 그런 돈이 없는 형편을 잘 알았던 소하는 "유방은 원래 허풍이 심한 사람으로 큰소리나 칠 줄 알았지 뭐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했습니다(그러니 진심으로 대하지 말라)"라고 여공에게 전했지만, 여공은 유방을 환대하면서 그 관상을 보고 자신의 딸을 유방에게 시집보내기까지 했다. 이가 바로 [[고황후|여치]]이다.{{출처|날짜=201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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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 봉기 ===
====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봉기와 거병 ====
{{참고|진승·오광의 난}}
유방은 정장으로서 황릉 공사에 동원될 인부를 함양으로 데리고 가지만, 진의 가혹한 노동과 형벌을 두려워한 인부들은 차례차례로 도망쳤고 난처해진 유방은 술을 퍼마시고 만취한 상태로 남은 모든 인부들까지 도망치게하고서 자신도 다른 갈 길이 없는 인부들과 함께 소택(沼澤)에 숨었다.
 
진시황제 사후인 [[기원전 209년]], 진승과 오광이 봉기하고 그 세력은 점차 강대해져, 유방이 있던 패의 현령(縣令)도 반군에 협력할지를 놓고 동요하는 가운데 소하와 조참이 "현령을 따를 자는 아무도 없으니 인기 있는 유방을 내세워 반란에 가담하자!"고 외쳤다. 현령은 일단 그 진언을 수용했지만, 유방에게 사자를 보내놓고 생각이 바뀌어 성문을 닫고 유방을 내쫓으려 했다. 유방은 꾀를 내어 비단에 쓴 편지를 성내에 던졌다. 편지에는 "지금 이 성을 필사로 지키는데 제후(반란군)가 머지않아 패를 공락하면 패 사람들에게도 재앙이 미치니 지금 현령을 죽여서 의지가 될 인물(유방)을 수장으로 세워야 한다"고 써 있었고 성내 사람들은 현령을 죽이고 유방을 결국 맞았다. 유방은 처음에는 "천하는 흐트러지고 군웅이 싸운다. 나 같은 사람을 선택했다가는 한 번에 패하리라. 다른 사람을 택해야 한다"며 사퇴했지만, 소하와 조참까지 나서서 유방을 현령으로 추천했으므로, 유방은 이를 수용했다. 현령이 된 이후 패공(沛公)으로 불린 때 유방이 모은 병력은 2천 명에서 3천 명을 웃돌았고 부하로는 소하나 조참 말고도 개고기 도살업자이자 유방의 동서였던 [[번쾌]](樊噲), 유방의 어릴 적 친구로서 동일에 태어난 [[노관]](盧綰), 현의 마구간지기 [[하후영]](夏侯嬰), 방직업자 [[주발 (중국)|주발]](周勃) 등이 있었다. 이 군단으로 주변 현을 공격하면서 [[옹치]](雍齒)에게 자신이 없는 동안 풍의 수비를 맡겼는데 옹치는 구 위(魏) 땅에 할거하던 [[위구]](魏咎)의 회유에 넘어가 유방을 저버리고 위구에게 가담했다. 격노한 유방은 풍을 공격하지만 함락시키지 못한 채 하는 수 없이 패로 돌아와야 했다. 당시 진승은 진의 장수 [[장한장함]](章邯)의 군에 패하고 도망치다가 피살되고 진승의 부하 [[경구]](景駒)가 영군(甯君)과 진가(秦嘉)에 의거해 왕으로 옹립되었다. 풍을 차지하려면 병력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 유방은 경구에게 군사를 빌리러 간다.
 
[[기원전 208년]], 유방은 영군과 연합해 진군과 싸웠으나 패했지만, 새로이 공격해 함락시킨 탕(碭, 지금의 [[안후이성]] 탕산碭山. 탕이란 돌벽)에 주둔하던 군사 5천 명에서 6천 명을 수합해서 하읍(下邑, 현재 [[하남 성]] 녹읍)을 함락시켰으며, 이 병력으로써 풍(豊)을 재공격해 겨우 떨어뜨렸지만, 풍을 차지하기에 앞서 유방은 풍과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중요한 것을 손에 넣었다. 책사 [[장량]]이다. 시황제 암살에 실패하고서 구 한(韓) 땅에서 병사를 모아 진과 싸우려 했으나 실패하고 유(留, 패의 동남) 땅의 경구에게 가담하려고 했다. 자신이 지도자로서의 자질은 부족하다는 사실을 자각했던 장량은 자신의 병법을 다양한 인물에게 말하고 다녔지만 아무도 그것을 들어주지 않는 가운데 유방만은 자신이 한 말을 경청하자 감격해 "패공께서는 참으로 하늘이 내리신 영웅호걸이십니다"라며 유방을 칭송한 후 유방의 작전 대부분을 입안했고 장량이 한 말을 유방은 거의 무조건 들어주어 천하를 결국 잡는 유방과 장량은 생각 가능한 범위에서 가장 완벽하다고 간주되는 군신 관계의 표상으로 후세인에게 추앙받는다.
 
==== 초나라 군대의 진나라 정벌에 동참 ====
그 무렵 경구는 [[항량]](項梁)에게 살해되고 항량이 새로운 반란군의 두령이 되었으며, 구 초 회왕(懷王)의 손자를 데려다 초왕(楚王)으로 앉히고 조부처럼 회왕이라 부르게 했다〔후일 항우에게 칭호 [[초 의제|의제(義帝)]]를 받았다〕. 유방은 항량의 세력하에 들어가 항량의 조카인 [[항우]]와 함께 진군과 싸웠다. 진군을 수차 물리친 항량은 자신의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진군을 얕보다가 그만 [[장한장함 (진)|장한장함]]에게 피살됐다. 유방 은 군을 돌려 새로 반군 거점이 된 팽성[彭城, 현재 강소 성 서주 시]로 집결했다. 항량을 죽인 장감은 북으로 조(趙)를 공격해 조왕의 거성인 거록(鉅鹿)을 포위했고 조는 초에 구원을 요청했다. 회왕은 [[송의]](宋義)·항우·[[범증]](范增)을 장군으로 하는 주력군을 보내 진군을 격파하고사 함양으로 즉시 진격하면서 따로 유방을 별동대로 서부를 돌아 함양을 치게 한다는 작전을 세웠으면서 "가장 먼저 관중[함양 일대]에 들어간 자를 그 땅의 왕으로 봉하겠다."라고 약속했다. 조로 향했던 항우는 도중에 행군을 의도로 늦추던 송의를 죽이고 스스로 총지휘관이 되어 도강하고서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3일치 식량만을 남긴 채 나머지 물자를 모두 없애고 퇴로를 끊어 병사들을 필사로 싸우게 한다는 굉장한 전술로 진군을 격파하여 용맹을 진작하고서 함양으로 진군하는 도중에 진의 포로 20만 명을 생매장하기도 했는데 이는 후일 항우를 다룬 악평 중 하나로서 항우의 발목을 잡는다.
 
==== 정벌군 주력이 아닌 별동대의 앞선 함양 입성 ====
유방이 이끄는 별동대 기세는 항우군에 비하면 질과 양이 뒤떨어졌고 군기도 제대로 잡혀있지 않은 병사들을 이끌고 간신히 고양〔高陽, [[하남 성]] 기현杞縣〕이라고 하는 곳까지 왔다. 여기서 유생 [[역이기]](酈食其)가 유방을 찾아왔다. 평소 유학자라면 질색했던 유방은 역이기에게도 마찬가지로 대했고 역이기를 만난 자리에서도 다리를 아무렇게나 뻗어서 여자들에게 다리를 주무르게 하는 유방의 태도를 두고 역이기가 일갈하자 유방은 무례를 사과하고 역이기에게 의견을 묻자 역이기는 유방의 군대를 까마귀떼처럼 무질서한 군대[오합지졸]라고 지적하면서 "여기서 멀지 않은 진류(陳留)는 교통의 요지로 식료를 아낄 수 있으니 이를 얻어야 한다. 성주는 반군을 위협스럽게 생각하는데 항복해도 신변을 보장한다고보장함다고 약속하기만 하면 유방에게 귀순하게끔 설득하겠다"고 제안했다. 유방은 이를 수용했고 진류성 성주는 설득에 좇아 항복했으며, 유방은 교통의 요지와 막대한 자금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손에 넣었다. 유방은 병력을 정돈하여 진군해 개봉(開封)을 공락하고서 한에 들러서 소수 병력으로 고전하던 한의 왕성과 장량을 구원하고 진군을 내쫓아 한을 재건했고 그 은의를 내세워 장량을 객장(客將)으로서 빌린다.
 
나아가 남양(南陽)을 공략하고 성주가 도망치고 없는 완[宛, 지금의 하남 성河南省 남양南陽]을 포위해 항복시켜서 진의 영역에 더욱 바짝 다가간 때 유방은 진류에서 했듯이 항복만 하면 성주의 지위는 보전해 주었기에 쓸데없이 전투할 필요도 없었고 진군 속도도 항우보다 빨랐다. 유방은 관중 남부 관문인 무관(武關)까지 결국 이르렀다. 이 무렵 항우도 조에서 진군 주력을 격파했고 진 내부는 크게 동요했다. 시황제 사후 2세 황제를 내세워 전권을 장악한 환관 조고(趙高)는 패전 사실이 발각되면 자신이 책임저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던 나머지 2세 황제를 죽이고는 [[기원전 207년]]에 이르러 유방에게 관중을 둘로 나누어 각자 왕이 되자는 밀서를 보내지만, 이를 가짜라고 판단한 유방은 군대를 이끌고 무관의 수비대장을 장량의 계책으로 속이고 무관을 차지한다[이후 조고는 왕으로 세우려던 자영에게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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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이때 소하는 함양에 입성하자 마자 진나라의 [[승상]]부과 어사부의 율령과 도서들을 챙겨두었는데 이 정보들은 후일 초한전쟁과 한 왕조의 법률 제정과 지방 통치에 유익하게 사용되었다고 한다<ref>{{서적 인용|url=|제목=사기, 소상국세가|성=[[사마천]]|이름=|날짜=|출판사=|확인날짜=}}</ref>
 
==== 점령 지역에 군사행동을 명령한 유방 ====
==== 한왕에 책봉 ====
패상으로 물러난 유방은 그곳에서 관중 땅의 부로(父老)들을 모아서 약법삼장(約法三章)을 선언한다. 사회 전반에 걸쳐 통제와 제재로 일관한 진의 가혹한 법률<ref>그 탓에 관청의 관인이 기분에 따라 처벌했고 특히 정치를 비판하는 죄를 대상으로 한 처벌은 마구잡이로 남용되곤 했다</ref>을 "사람을 죽이면 사형하고 다치게 한 자는 처벌하며, 물건을 훔친 자는 처벌한다."는 세 가지 조항만을 남기고 모두 폐지하여 관중 땅에서 유방에 대한 지지도가 크게 오르게 되었고 유방이 왕이 되지 않는 것을 걱정할 정도였다. 이 '약법삼장'은 후일 '간편한 법률'을 가리키는 법률의 격언이 되었다.
 
그 무렵 항우는 동부에서 관중으로 진격했다. 유방은 어떤 사람의 "당신이 먼저 관중에 들어왔지만, 항우가 오면, 그 공적을 가로채리라. 관중을 봉쇄하면, 당신이 그대로 관중의 왕이다"라는 진언을 듣고 관중의 동부 관문인 함곡관(函谷關)에 병사를 파견해 지키게 했다. 유방이 관중에 들어올 수 있었던 최대의 요인은 어려운 상대인 진의 주력군을 대부분 항우가 맡았던 사정에 있었는데도 이미 관중 왕인 듯이 행세하면서 함곡관을 닫아버린 행위에 격노한 항우는 [[영포]](英布)를 시켜 이를 쳐부수게 했다. 함곡관에 들어온 항우는 40만 군세를 몰아 유방을 멸하려고 했고(여기에는 참모 범증의 진언도 있었다), 유방의 부하인 조무상(曹無傷)도 이에 영합하느라 "패공은 관중의 왕위를 노리고 진왕 자영을 재상으로 하여 관중의 보물을 독점하려 하고 있다"고 중상모략하며 항우의 분노를 부채질하기에 이르렀다. 병력도 용맹도 유방보다 압도적 우위에 있던 항우와 맞서야 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때마침 항우의 숙부인 항백(項伯)이 유방군의 진중에 있었다. 일찍이 장량에게 은혜받은 일이 있었던 항백은 장량에게 보은하고자 항우의 공격을 앞둔 유방군 진영에서 장량을 구원하려고 했으나 장량은 유방을 버리고 혼자 살아남지 않겠다며 거절하면서 항백을 유방에 소개시키고 어떻게든 항우에게 항변해야 한다며 간절히 부탁했다. 항백의 중개로 유방은 항우가 주재한 홍문(鴻門)에서 변명하고자 참석하여 목숨을 수차 위협받았으나 장량이나 번쾌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홍문의 회]]). 진중으로 돌아온 유방은 변절자 조무상을 죽이고 그 목을 군문에 내걸었다.
 
==== 좌천된 수준으로 한왕에 책봉 ====
그 후 항우는 함양에 들어와 항복한 자영을 위시해 진의 왕족이며 관리 4천 명을 몰살시키고 진의 모든 보물을 거두어 돌아오면서 [[아방궁]]을 비롯해 진의 화려한 궁전을 다 태워 버렸으며, 시황제의 무덤을 파헤쳐 부장된 여러 보물을 훔친 행동은 유방의 관대한 행동과 대비되어 관중 백성의 민심이 항우에게서 유방에게로 기우는 한 요인이 된다. 나아가 팽성으로 돌아온 항우는 '서초패왕(西楚覇王)'을 자칭하면서 이름뿐인 왕이었던 회왕을 '의제'로 높여서 변경으로 보냈다가 길에서 죽였다. [[기원전 206년]], 항우는 제후들에게 진나라 이전의 봉건제를 실시한다. 공적보다는 항우와의 친소(親疏)관계를 기준으로 성립했던 이 봉건제는 제후들의 원성을 샀고 봉건제 시행 직후에 반란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유방에게도 약속된 관중 땅이 아닌 그 서부의 한 지방으로 당시로서 벽지이자 변경에 불과했던[통일 이전에 진 영토이기도 했던] 한중(漢中)과 파촉(巴蜀, 중국 [[사천 성]]의 옛 호칭)이 주어졌는데 '좌측[서부]으로 옮긴다'고 한 데서 후일 '좌천(左遷)'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다〔단, 당시 '관중'이란 단순히 '관중 분지'만을 가리키는 때와 '통일 이전 진의 영토' 전역을 가리키는 용법이 있었고 양방 모두 용법이 병용됐다. 즉 후자를 좇으면, '관중을 준다'고 했던 약속은 지켜졌다고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유방이 동부로 진입을 방어하고자 관중은 장한장함, [[사마흔]], [[동예]] 등 구 진의 장군 삼 명에게 분배된다. 당시 한중은 유배지로 여겨질 정도로 변경이었다. '촉의 벼랑길'이라 불리는, 사람 일 명이 겨우 통과할 길 말고는 한중으로 통하는 어떤 길도 없었고 유방이 데리고 있던 병사 3만 명은 도중에 대부분이 도망쳐서 남은 병사들도 동부로 돌아가기만을 바랐다.
 
=== 초한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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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유방 진영에 가담한 또 한 사람이 바로 [[한신 (회음후)|한신]](韓信)이다. 원래 항우군에 속했지만, 재능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자 울분을 품고 유방에게 돌아선 한신은 처음에는 일개 병졸에 불과한 하급장교였지만, 한신의 재능을 알아본 소하가 천거하여 대장군(大將軍)으로 기용된 때 한신은 "항우는 강하지만, 항우의 힘은 무르다. 특히 부하 장수들이 처우에 불만이 팽배해 있으니 동으로 갈 기회는 반드시 온다. 유방은 항우와 반대로만 행동하면 인심을 장악할 수 있다."라며, "관중의 삼왕은 항우에게 병사 20만 명을 잃은 구 진의 장군으로, 인심은 따르지 않겠고 관중은 간단히 함락되리라. 유방의 병사들은 동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니 이런 귀향의 정을 잘 이용하면 강력이 되리라."라고 진언했고 유방은 한신의 진언을 전면으로 이용했다.
 
한신의 말대로 항우를 대상으로 한 반란이 잇따르자 항우는 진압하고자 도처로 출정해야 했는데 자신을 의심하는 항우의 눈을 피하고자 유방은 장량의 계책대로 파촉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길을 부수어 자신이 한중을 벗어날 의지가 없다고 천명하는 한편, 항우에게 온화하고 공손한 어조의 편지를 보내며 반항할 뜻이 없다고 현로했다. 안도한 항우는 반란한 제의 전영(田榮)을 토벌하러 나섰고 유방은 자신이 부순 길 이전에 쓰던 길로 관중으로 출격해 장한을장함을 단번에 격파하고 관중을 장악하여 여기에 유방이 항우를 공격하기 위해 출전하였을 때 승상 소하는 [[사직 (역사)|사직]](社稷)을 세웠다.<ref>{{웹 인용|url=http://www.yangco.net/new0822/?doc=bbs/gnuboard.php&bo_table=sega&page=1&wr_id=83|제목=사기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23.소하(蕭何)|저자=양승국|날짜=2012-08-04|출판사=열국연의}}</ref> 원정지인 제에서도 변함없이 함락된 성의 주민을 몰살하는 강경한 진압을 거듭하는 항우에게 제의 백성은 완강하게 저항했고 제에서 항우가 고전하는 사이에 유방은 제후왕들을 항복시키거나 정복하면서 동으로 동으로 항우의 본거지 팽성을 향해 진격해 왔다.
 
==== 거듭되는 패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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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 이후 숙청 ===
[[파일:Changling 1.jpg|섬네일|장릉 (長陵), 산시성 셴양시 한고조의 [[:en:Chinese_pyramids|무덤]].]]
 
역사학자들은 출신 성분이 비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재를 중용할 줄 알았던 유방이 출신 성분도 좋고 출중한 전투 능력을 앞세웠으나 백성에게 무자비했던 항우를 이긴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유방은 교육 수준이 낮은 서민 출신의 인물이어서 당시 지식인과 유생들을 무시하였다.<ref name="김덕삼 한대 도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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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20만 명으로 반란했던 회남왕 영포는 조카 오성에게 살해당했지만, 영포를 칠 때 화살에 맞은 상처가 악화한 유방은 [[기원전 195년]], 여치에게 향후 누구를 승상(丞相)으로 세울지에 인사책을 남기고서 죽은 때 자신의 최후를 깨달은 유방은 "사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 묻는 여치에게 "(승상이자 상국인) 소하에게 맡기면 좋겠다. 그 다음은 조참이 좋으리라."라고 대답하고 거듭 몇 번을 "그 다음은요?" 하고 묻는 여치에게 "그 다음은 왕릉이 좋겠지만, 왕릉은 너무 우직하니 진평을 보좌로 삼으면 되겠지만, 진평은 너무 두뇌가 명석하니 모두 맡기면 위험하다. 사직을 안정시키는 것은 분명히 [[주발 (중국)|주발]]이리라."라고 대답했다. "그 다음은요?" 라고 더욱더 묻는 여치에게 "대체 너는 언제까지 살 생각이냐? 그 다음은 너와 상관없는 일이다."라고 쏘아버렸다〔이 유언은 사후에 모두 적중하는데 여기서 유방의 사람 보는 안목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 숙청후 유씨 일족 분봉왕들의 임명 ===
{{참고|족벌주의}}
많은 공신과 제후왕이 숙청된 공석에 유방은 자신의 유씨 일족을 왕작에 모두 봉했다. 가장 공이 크던 번쾌도 죽을 위기를 맞았지만, 귀양 가는 도중에 유방이 죽자 번쾌는 참형을 면한다. 유방의 사후 태자 영이 혜제로 즉위했으나 실권은 모두 태후의 일가인 여씨 일문이 쥐었고 강대한 제후들도 모두 유방에게 숙청된 상태에서 태후에게 맞설 사람은 없었으나 여치 사후 주발과 진평에 의거해 여씨는 숙청되어 문제(文帝)가 옹립된 후 한은 문경(文景)의 치(治)라는 번영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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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공용과 분류|漢高祖|전한 고제|Liu_Bang}}
{{포털|중국|역사}}
* 한고조의 무덤 [[:en:Han Changling|장릉]]
* [[초한지]]
* [[항우]]
* [[소하]]
* [[전한 혜제]]
* [[미앙궁]]
 
==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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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거 통제}}
{{기본정렬:고제, 전한}}
 
[[분류:전한 고제| ]]
[[분류:기원전 247년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