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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봉기: 홍문의 회 이후로 초의제가 책봉한 왕권이므로, 한왕 책봉 구분을 홍문의 회 이후로 옮김. 한왕 문단 제목을 변경함. 함곡관 봉쇄에 문단 제목을 추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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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태조 고황제 유방'''(漢 太祖 高皇帝 劉邦, [[기원전 247년]] 혹은 [[기원전 256년]] ~ [[기원전 195년]] 6월 1일)은 [[전한]]의 초대 [[황제]](재위: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95년]])로, [[자 (이름)|자]]는 '''계'''(季)이다.
 
패현(沛縣)의 정장(亭長)<ref>정(亭)이란 당시 일정 거리마다 배치되어 있었던 역소의 일종을 가리킨다.</ref>으로 있다가 [[진나라]]에 맞서는 봉기에 가담하고서 진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한때는 [[관중]](關中) 땅을 지배 아래 두었다. [[항우]](項羽)에 의해 [[기원전 206년]] 서부 한중(漢中)에 좌천되어 한왕(漢王)으로 봉해졌으나, 동진하여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에서 항우를 토벌하고 전한을 세웠다.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고황제(高皇帝)이며, 일반으로 [[한고조|고조]](高祖)로 불린다.<ref>원래 유방은 고제(高帝)라고 불러야 올바르지만, [[사마천]]이 [[사기 (역사서)|사기]]에서 '고조'라고 칭한 이래 이 호칭이 주지됐다.</ref> 고조는 군현제와 봉건제를 병용한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무위]]를 숭상한 유학자 [[육가]]의 영향 속에서 무위를 실행하며<ref name="김덕삼 한대 도가 사상">김덕삼 [https://circ.jams.or.kr/po/volisse/sjPubsArtiPopView.kci?soceId=INS000007785&artiId=SJ0000000144&sereId=SER000000003 ‘변화’와 ‘장’을 통한 한대 도가 사상의 고찰: 황로학을 중심으로] 국민대학교 중국지식네트워크 13권13호 (2019년5월) 231~256쪽 {{doi|10.35389/ckn.13.13.201905.231}}</ref> 한고조 유방은 [[도교]] 정신을 매우 중시하였고,<ref>{{뉴스 인용|url=http://www.seniorsinmun.com/news/articleView.html?idxno=2381|제목=유교, 한무제 그리고 정도전|날짜=2016-01-15|출판사=시니어신문|확인날짜=2021-06-27|archive-date=2021-06-27|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210627172746/http://www.seniorsinmun.com/news/articleView.html?idxno=2381|url-status=}}</ref> [[황제]]와 [[노자]]를 지칭하는 황로사상을 이용하여 나라를 다스렸다.<ref name="김덕삼 한대 도가 사상"/>
 
[[사마천|사마천(司馬遷)]]은 [[진나라|진나라(秦)]] 말 전쟁이 많아 사회가 혼란하였으나 유방(劉邦)은 전략가 [[장량|장량(張良)]]의 여유와 노련한 경영으로 마침내 [[한나라|한나라(漢)]]를 건국하는데 성공하였다라성공하였다라고 평했다.
 
== 생애 ==
=== 탄생 ===
유방은 패군(沛郡) 풍현(豊縣)의 중양리(中陽里),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강소 성]](江蘇省) [[서주 시쉬저우시]](徐州市) 패현(沛縣)에서 아버지 [[유태공]](劉太公)과 어머니 유온(劉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 [[유백]]·[[유희 (대경왕)|유희]]가 있었고 아래로 이복 동생 [[유교 (초원왕)|유교]]가 있었다. 유방의 출생년을 두고서는 추측이 두 가지가 있다.
 
유방의 어머니 유온이 유방을 낳기 전에 어느 연못 옆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몸 위에 붉은 용이 올라오는 꿈을 꾸고서 유방을 낳았다고 한다.{{출처|날짜=2013-06-16}}<ref>이 탄생설에 관해선 유력한 설 한 가지가 있다. 유방이 자기의 형제들과 아비인 태공과 다르게 성격이 유난히 괴팍했다는 점과 다른 왕조들의 시초와 다르게 삽입한 용 설화로 말미암아 유방의 어머니 유온이 연못으로 축제로 갔다가 산적의 습격으로 인해 산적들에게 잡혀서 강간당해 낳은 것이 유방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당시 백성이 축제를 자주 나갔으며, 그런 여러 축제에 산적이 습격하는 일은 허다해서 신빙성이 있으며, 일부러 '붉은 용'을 쓴 점은 용과 같은 유방의 아비를 뜻하면서도, 성격과 모습이 무서운 산적을 뜻하여 일부러 용을 붉다고 표현한 것이라 한다.</ref> 유방의 이름인 '방(邦)'은 《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후한]]의 학자 순열(荀悅, 148년 ~ 209년)이 지은 편년체 역사서 《한기(漢紀)》에 된 기록을 후세 학자들이 《사기》, 《[[한서]]》에 주석하면서 한 인용으로, 발굴된 유물 자료들로써 대체로 옳다고 간주되며, 자(字)인 계(季)는 '막내'라는 뜻이다.<ref>또한, 유방의 부모명도, 부 '태공'은 나이 지긋한 남자를 부르는 일반 호칭이고 모 '온(실제 성은 미상)'도 마찬가지로 '아주머니'와 같은 일상 호칭이며, 유방의 큰형인 백(백은 자이다)의 이름도 '장남'이라는 뜻이다. 즉 유방 일가의 본명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고 사마천이 《사기》를 쓰면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명에 그냥 이런 간단한 단어를 붙여버렸다는 설도 있으며, 당시 중국에서 서민은 정식 이름을 쓰지 않고 '유백 = 유씨 댁 큰아들'이나 '유계=유씨 댁 막내' 정도로만 불렀다는 설도 있으나 손윗형이나 이복 동생의 명은 각각 '희', '교'가 전해지는 형편으로 보아, 일가 전원의 명이 불명인 것은 아니고 당시 피휘(避諱) 관습 때문에 일부러 모호하게 적었다는 설도 전한다.</ref>
 
유방은 코가 높고 수염이 아름다워 소위 '용안'이라 불리는, 긴 얼굴에 코가 돌출된 듯한 얼굴이었으며 넓적다리에는 반점 72개가 있었다고 한다(72라는 숫자는 1년 360일을 오행사상의 5로 나눈 숫자로서 당시로서는 상당히 길한 수였다).
 
=== 진시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협객 ===
{{참고|아방궁}}
진 말기 농민 반란에 가담하기 전의 유방은 소위 '협객(狹客)'으로서, 가업은 뒷전이고 주색에 빠져 살고 있었다. 연고지인 패동(沛東)에 있던 사수(泗水)의 정장(亭長, 지금의 파출소장)으로 취임한 뒤에도 성실하게 임무에 임하지는 않았다. 이때 유방과 함께 일했던 패의 관인 중에는 후일 유방의 패업(覇業)을 도울 [[소하]](蕭何)와 [[조참]](曹參)도 있었지만, 이들도 아직까지는 유방을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는데도 유방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고 하는 일이 실패해도 주위에서 옹호해 주었으며, 술집에 들어가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여 가게가 가득 찼고 이 시기에 [[장이]](張耳)의 식객(食客)으로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출처|날짜=201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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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 봉기 ===
====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봉기와 거병 ====
{{참고|진승·오광의 난}}
유방은 정장으로서 황릉 공사에 동원될 인부를 함양으로 데리고 가지만, 진의 가혹한 노동과 형벌을 두려워한 인부들은 차례차례로 도망쳤고 난처해진 유방은 술을 퍼마시고 만취한 상태로 남은 모든 인부들까지 도망치게하고서 자신도 다른 갈 길이 없는 인부들과 함께 소택(沼澤)에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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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08년]], 유방은 영군과 연합해 진군과 싸웠으나 패했지만, 새로이 공격해 함락시킨 탕(碭, 지금의 [[안후이성]] 탕산碭山. 탕이란 돌벽)에 주둔하던 군사 5천 명에서 6천 명을 수합해서 하읍(下邑, 현재 [[하남 성]] 녹읍)을 함락시켰으며, 이 병력으로써 풍(豊)을 재공격해 겨우 떨어뜨렸지만, 풍을 차지하기에 앞서 유방은 풍과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중요한 것을 손에 넣었다. 책사 [[장량]]이다. 시황제 암살에 실패하고서 구 한(韓) 땅에서 병사를 모아 진과 싸우려 했으나 실패하고 유(留, 패의 동남) 땅의 경구에게 가담하려고 했다. 자신이 지도자로서의 자질은 부족하다는 사실을 자각했던 장량은 자신의 병법을 다양한 인물에게 말하고 다녔지만 아무도 그것을 들어주지 않는 가운데 유방만은 자신이 한 말을 경청하자 감격해 "패공께서는 참으로 하늘이 내리신 영웅호걸이십니다"라며 유방을 칭송한 후 유방의 작전 대부분을 입안했고 장량이 한 말을 유방은 거의 무조건 들어주어 천하를 결국 잡는 유방과 장량은 생각 가능한 범위에서 가장 완벽하다고 간주되는 군신 관계의 표상으로 후세인에게 추앙받는다.
 
==== 초나라 군대의 진나라 정벌에 동참 ====
그 무렵 경구는 [[항량]](項梁)에게 살해되고 항량이 새로운 반란군의 두령이 되었으며, 구 초 회왕(懷王)의 손자를 데려다 초왕(楚王)으로 앉히고 조부처럼 회왕이라 부르게 했다〔후일 항우에게 칭호 [[초 의제|의제(義帝)]]를 받았다〕. 유방은 항량의 세력하에 들어가 항량의 조카인 [[항우]]와 함께 진군과 싸웠다. 진군을 수차 물리친 항량은 자신의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진군을 얕보다가 그만 [[장함 (진)|장함]]에게 피살됐다. 유방 은 군을 돌려 새로 반군 거점이 된 팽성[彭城, 현재 강소 성 서주 시]로 집결했다. 항량을 죽인 장감은 북으로 조(趙)를 공격해 조왕의 거성인 거록(鉅鹿)을 포위했고 조는 초에 구원을 요청했다. 회왕은 [[송의]](宋義)·항우·[[범증]](范增)을 장군으로 하는 주력군을 보내 진군을 격파하고사 함양으로 즉시 진격하면서 따로 유방을 별동대로 서부를 돌아 함양을 치게 한다는 작전을 세웠으면서 "가장 먼저 관중[함양 일대]에 들어간 자를 그 땅의 왕으로 봉하겠다."라고 약속했다. 조로 향했던 항우는 도중에 행군을 의도로 늦추던 송의를 죽이고 스스로 총지휘관이 되어 도강하고서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3일치 식량만을 남긴 채 나머지 물자를 모두 없애고 퇴로를 끊어 병사들을 필사로 싸우게 한다는 굉장함굉장한 전술로 진군을 격파하여 용맹을 진작하고서 함양으로 진군하는 도중에 진의 포로 20만 명을 생매장하기도 했는데 이는 후일 항우를 다룬 악평 중 하나로서 항우의 발목을 잡는다.
 
==== 정벌군 주력이 아닌 별동대의 앞선 함양 입성 ====
유방이 이끄는 별동대 기세는 항우군에 비하면 질과 양이 뒤떨어졌고 군기도 제대로 잡혀있지 않은 병사들을 이끌고 간신히 고양〔高陽, [[하남 성]] 기현杞縣〕이라고 하는 곳까지 왔다. 여기서 유생 [[역이기]](酈食其)가 유방을 찾아왔다. 평소 유학자라면 질색했던 유방은 역이기에게도 마찬가지로 대했고 역이기를 만난 자리에서도 다리를 아무렇게나 뻗어서 여자들에게 다리를 주무르게 하는 유방의 태도를 두고 역이기가 일갈하자 유방은 무례를 사과하고 역이기에게 의견을 묻자 역이기는 유방의 군대를 까마귀떼처럼 무질서한 군대[오합지졸]라고 지적하면서 "여기서 멀지 않은 진류(陳留)는 교통의 요지로 식료를 아낄 수 있으니 이를 얻어야 한다. 성주는 반군을 위협스럽게 생각하는데 항복해도 신변을 보장함다고 약속하기만 하면 유방에게 귀순하게끔 설득하겠다"고 제안했다. 유방은 이를 수용했고 진류성 성주는 설득에 좇아 항복했으며, 유방은 교통의 요지와 막대한 자금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손에 넣었다. 유방은 병력을 정돈하여 진군해 개봉(開封)을 공락하고서 한에 들러서 소수 병력으로 고전하던 한의 왕성과 장량을 구원하고 진군을 내쫓아 한을 재건했고 그 은의를 내세워 장량을 객장(客將)으로서 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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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이때 소하는 함양에 입성하자 마자 진나라의 [[승상]]부과 어사부의 율령과 도서들을 챙겨두었는데 이 정보들은 후일 초한전쟁과 한 왕조의 법률 제정과 지방 통치에 유익하게 사용되었다고 한다<ref>{{서적 인용|url=|제목=사기, 소상국세가|성=[[사마천]]|이름=|날짜=|출판사=|확인날짜=}}</ref>
 
==== 장악점령 지역에 군사행동을 명령한 유방 ====
패상으로 물러난 유방은 그곳에서 관중 땅의 부로(父老)들을 모아서 약법삼장(約法三章)을 선언한다. 사회 전반에 걸쳐 통제와 제재로 일관한 진의 가혹한 법률<ref>그 탓에 관청의 관인이 기분에 따라 처벌했고 특히 정치를 비판하는 죄를 대상으로 한 처벌은 마구잡이로 남용되곤 했다</ref>을 "사람을 죽이면 사형하고 다치게 한 자는 처벌하며, 물건을 훔친 자는 처벌한다."는 세 가지 조항만을 남기고 모두 폐지하여 관중 땅에서 유방에 대한 지지도가 크게 오르게 되었고 유방이 왕이 되지 않는 것을 걱정할 정도였다. 이 '약법삼장'은 후일 '간편한 법률'을 가리키는 법률의 격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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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20만 명으로 반란했던 회남왕 영포는 조카 오성에게 살해당했지만, 영포를 칠 때 화살에 맞은 상처가 악화한 유방은 [[기원전 195년]], 여치에게 향후 누구를 승상(丞相)으로 세울지에 인사책을 남기고서 죽은 때 자신의 최후를 깨달은 유방은 "사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 묻는 여치에게 "(승상이자 상국인) 소하에게 맡기면 좋겠다. 그 다음은 조참이 좋으리라."라고 대답하고 거듭 몇 번을 "그 다음은요?" 하고 묻는 여치에게 "그 다음은 왕릉이 좋겠지만, 왕릉은 너무 우직하니 진평을 보좌로 삼으면 되겠지만, 진평은 너무 두뇌가 명석하니 모두 맡기면 위험하다. 사직을 안정시키는 것은 분명히 [[주발 (중국)|주발]]이리라."라고 대답했다. "그 다음은요?" 라고 더욱더 묻는 여치에게 "대체 너는 언제까지 살 생각이냐? 그 다음은 너와 상관없는 일이다."라고 쏘아버렸다〔이 유언은 사후에 모두 적중하는데 여기서 유방의 사람 보는 안목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 숙청후 유씨 일족 분봉왕들의 임명 ===
{{참고|족벌주의}}
많은 공신과 제후왕이 숙청된 공석에 유방은 자신의 유씨 일족을 왕작에 모두 봉했다. 가장 공이 크던 번쾌도 죽을 위기를 맞았지만, 귀양 가는 도중에 유방이 죽자 번쾌는 참형을 면한다. 유방의 사후 태자 영이 혜제로 즉위했으나 실권은 모두 태후의 일가인 여씨 일문이 쥐었고 강대한 제후들도 모두 유방에게 숙청된 상태에서 태후에게 맞설 사람은 없었으나 여치 사후 주발과 진평에 의거해 여씨는 숙청되어 문제(文帝)가 옹립된 후 한은 문경(文景)의 치(治)라는 번영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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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한지]]
* [[항우]]
* [[소하]]
* [[전한 혜제]]
* [[미앙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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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거 통제}}
{{기본정렬:고제, 전한}}
 
[[분류:전한 고제| ]]
[[분류:기원전 247년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