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침용 땅굴
남침용 땅굴(南侵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을 침략할 목적으로 건설한 군사용 터널을 말한다. 1997년 미국 해병대가 발간한 《북한 핸드북》에 따르면, 남침용 땅굴은 모두 합하여 20여 개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1][2]
발견현황
편집2024년까지 총 4개의 남침용 땅굴이 발견되었다. 1998년에는 남침용 땅굴 징후가 있는 21곳 가운데 개연성이 높은 서부전선 5곳, 동부전선 2곳, 총 7곳에 대해 시추작업을 벌였지만 추가적인 발견을 하지 못했다.
2000년 이후 북한 귀순자로부터 얻은 첩보를 입수해 14곳에 대한 탐사를 하였지만 추가 발견을 하지 못했다.
2009년과 2013년 사이에도 4~5차례 탐사작업을 하였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육군에서는 지금도 매년 DMZ에서 땅굴 조사작업을 실시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총 4개의 땅굴 중, 제1땅굴을 제외한 3개의 땅굴이 관광자원화가 되었다.
제1땅굴
편집1974년 11월 5일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에서 발견되었다. 너비 90 cm, 높이 1.2 m, 지하 2.5~4.5 m, 길이 3.5 km에 달하는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이 땅굴은 서울에서 65 km에 위치해 1시간에 1개 연대 이상의 무장병력과 중화기, 포신이 통과할 수 있는 땅굴이다.
발견 당시 육군 25사단 수색조가 수색임수를 수행 하던도중, 땅 밑에서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고 해당 지역을 파던 도중, 북한 초소로부터 사격을 받았다. 이에 우리 군도 대응사격을 하면서 해당지역을 조사한 결과 땅굴이 발견되었다.[3]
제2땅굴
편집1975년 3월 강원도 철원군 근동면에서 발견되었다. 북한에서 군사분계선까지 2,400 m, 군사분계선에서 우리쪽까지 1,100 m이고 너비와 높이 2 m, 길이 3.5 km, 지하 50~160 m이다. 국군 초병이 경계근무를 하던 도중 폭음을 듣고 땅굴의 존재를 의심하여 시추가 시작되었고 1975년 3월 19일에 발견되었다.[4]
국군과, 주한미군의 공병대, 미국 민간기술진이 탐사에 참여하여 45개의 시추공을 뚫어 땅굴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화강암 특성상 내부에 빈 공간이 생길 수가 없는데 채굴한 시추석이 일정하게 짧았고, 채굴 도중 검출된 모래가 강원도 산악지대에서 나타나는 모래가 아니었다. 땅굴 내부에는 북한군이 철수하면서 국군의 탐사를 지연시키기 위해 쌓아놓은 3개의 돌벽이 있었다. 이 돌벽을 철거하는 도중 북한이 매설한 부비트랩을 건드려 1975년 4월 8일 7명, 1975년 5월 28일 1명, 총 8명의 국군장병이 전사하였다.
제3땅굴
편집1974년 9월 5일 북한에서 귀순한 김부성이 "자신은 남측 땅굴을 측량한 측량기사인데 비무장지대 안에 땅굴이 있다"고 제보하면서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5] 1978년 10월 17일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에서 발견되었다. 그 위치가 서울에서 가깝고, DMZ에서 남쪽 400 m, 판문점 남방 4 k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너비와 높이 2 m, 길이 1.635 km, 깊이 73 m이며 1시간에 3만여명의 무장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다. 또한 서울에서 44 km 지점에서 발견된, 가장 가까운 땅굴이다.
제4땅굴
편집1990년 3월 3일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에서 발견되었다. 폭 2 m, 지하 145 m, 전체길이 2,052 m이고 군사분계선 남쪽 1502에서 발견되었다.
땅굴 발견 과정에서 군견 헌트(HUNT)가 폭발물 탐지 중 화약냄새를 맡고 북한군이 설치해둔 목함지뢰를 밟고 폭사했다. 이런 공적을 기려 제4땅굴 바로 옆에 북한을 바라보는 헌트의 동상이 세워졌다.
같이 보기
편집- 터널전(땅굴전, en:Tunnel warfare)
- 척후병
- 참호전
- 기동전
- 터널굴착기(TBM)
- 남침땅굴을 찾는 사람들
- 김학철
- 베트남의 군사용 터널
각주
편집이 글은 한국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 |
이 글은 군사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