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빈 김씨
인빈 김씨(仁嬪 金氏, 1555년 3월 31일(음력 2월 29일) ~ 1613년 11월 30일(음력 10월 29일))는 조선 선조의 후궁이다. 추존왕 원종의 생모이자 인조의 할머니이기도 하다.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인빈 김씨
仁嬪 金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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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의 후궁 | |
이름 | |
별호 | 저경궁(儲慶宮) |
시호 | 경혜(敬惠)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55년 3월 31일(양력) |
사망일 | 1613년 11월 30일(양력) | (58세)
가문 | 수원 김씨 |
부친 | 김한우 |
모친 | 전주 이씨 |
배우자 | 선조 |
자녀 | 4남 5녀 |
능묘 | 순강원(順康園)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
생애
편집출생
편집1555년(명종 10년) 음력 2월 29일, 김한우와 전주 이씨의 딸로 태어났다. 인빈의 외조부인 이효성은 왕실의 일원으로, 효령대군의 아들인 보성군의 증손자이므로 선조와는 외가의 촌수상으로 14촌 남매지간이다.[1][2] 또 인빈의 언니가 신경과 결혼하여 낳은 딸은 광해군의 후궁으로 책봉된 소원 신씨이다.[3]
후궁 시절
편집이종 언니이자 명종의 후궁이었던 숙의 이씨(경빈 이씨)가 김씨를 데려다가 궁중에서 양육했는데,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의 눈에 들어 인순왕후의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인순왕후가 선조에게 후궁으로 추천하여 1573년(선조 6년)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에 책봉되었다.[4] 이후 정3품 소용(昭容), 종2품 숙의(淑儀), 종1품 귀인(貴人)을 거쳐 1604년(선조 37년) 11월 12일, 정1품 인빈(仁嬪)에 책봉되었다.
인빈은 광해군의 생모이자 선조의 후궁이었던 공빈 김씨와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공빈 김씨가 산후병으로 죽자 선조의 총애가 모두 인빈에게 옮겨가게 되었다. 또 이때를 틈타 인빈은 그녀의 아우인 김공량이 이산해 부자와 결탁하여 광해군의 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한 정철 등을 유배시키고 서인들을 조정에서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선조의 광해군에 대한 총애도 점차 사그라들었다.[5]
선조는 인빈 김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신성군을 매우 총애하였고, 인빈은 내심 신성군이 세자가 되길 바랬으나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고, 신성군은 의주에서 병사하였다.[6]
인빈은 이후 선조의 미움을 받던 광해군을 변호했고 임해군의 옥사가 있을 때에는 그녀의 소생들이 정사 공신에 책록됐다. 이로 인해 광해군은 ‘내가 서모의 은혜를 받아서 오늘이 있게 된 것이니, 그 의리를 감히 잊지 못한다.’라고 말하였다.[5]
사망
편집1613년(광해군 5년) 10월 29일, 5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조회를 3일간 정지하라고 명하였으나 사헌부에서 "인빈은 후궁일 따름이니, 법에 조회를 중지하는 예가 없었고, 예에도 역시 근거가 없습니다. 사사로운 은혜로 예법을 폐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반대하여 무마되었다.[7]
인빈 김씨의 졸기
- 선조(宣祖)의 후궁인 인빈 김씨(仁嬪 金氏)가 졸하였다.
- 그 아우인 김공량(金公諒)이 천한 관리로서 이산해(李山海) 부자와 서로 결탁하였는데,
- 이산해가 드디어 유언비어로서 궁궐과 내통하여 대신을 참소해 떠나게 하였다.
- 이때부터 빈이 정사에 간여한다는 비난을 받았고
- 이산해도 역시 사론(士論)에 버림을 받았다.
- 왕(광해군)의 어머니인 공빈(恭嬪)이 본래 인빈과 틈이 있었는데,
- 공빈이 산병(産病)으로 죽자 인빈이 공빈을 대신하게 되었다.
- 왕의 형제에 대한 (선조의) 총애는 드디어 줄어들었고
- 산해가 대신을 참소한 것은 이 기회를 틈탄 것이었다.
- 왕(광해군)이 동궁에 있을 때 자주 선조의 뜻을 잃자,
- 대비 이하 여러 후궁들이 동궁을 대할 때 불경한 경우가 많았다.
- 그러나 빈만은 유독 동궁을 후하게 섬겨서
- 바라는 바를 모두 은밀히 상(선조)에게 아뢰어 이루어 주었다.
- 유영경이 정인홍을 공격할 때 선조가 한창 동궁에게 노여움을 가졌으나,
- 빈이 변명을 하여 풀어졌다.
- 왕(광해군)이 일찍이 말하기를
- "내가 서모(庶母)의 은혜를 받아서 오늘이 있게 된 것이니, 그 의리를 감히 잊지 못한다."
- 하였다.
- 이 때문에 빈이 죽을 때까지 원종대왕 형제들이 모두 탈이 없었다.】
— 《광해군일기》[중초본] 71권,
광해 5년(1613년 명 만력(萬曆) 41년) 10월 29일 (계축)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에 장사지냈으며, 1755년(영조 31년) 앞서 영조가 격상한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와 격을 맞추어 경혜(敬惠)라는 두 글자 시호를 증시하고, 호칭도 원으로 격상하여 순강원(順康園)으로 올렸으며, 사당 역시 방에서 궁으로 격상하여 궁호를 저경궁(儲慶宮)으로 올렸다. 그와 함께 인빈이 입궁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숙의 이씨도 경빈(慶嬪)에 추증되었다.[8]
1908년에 왕의 사친이었던 여러 후궁들의 신주를 모두 육상궁으로 옮기며 그녀의 신주 역시 육상궁으로 옮겨졌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칠궁에 그 위패가 모셔져 있다. 1991년 10월 25일 순강원이 사적 제356호로 지정되었다.
후손
편집남편 선조와의 사이에서 4남 5녀를 낳았으며, 그 중 정원군(원종)의 장남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왕이 되니 그가 곧 인조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그녀의 아버지 김한우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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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편집
부군편집
자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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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빈 김씨가 등장하는 작품
편집각주
편집- ↑ 인빈 김씨 신도비문
- ↑ 이한우 (2008년 5월 15일). 《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 해냄. 265쪽. ISBN 978-89-7337-827-2.
- ↑ 《조선왕조실록》광해군 1년(1609) 6월 14일 6번째 기사.
- ↑ 이한우 (2008년 5월 15일). 《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 해냄. 256~257쪽. ISBN 978-89-7337-827-2.
- ↑ 가 나 《광해군일기》[중초본] 71권, 광해 5년(1613년 명 만력(萬曆) 41년) 10월 29일 (계축)
- ↑ 《선조실록》 32권, 선조 25년(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11월 5일 (신유)
왕자 신성군이 졸하다 - ↑ 《광해군일기》[중초본] 71권, 광해 5년(1613년 명 만력(萬曆) 41년) 10월 30일 (갑인)
사헌부가 인빈 김씨의 죽음으로 내린 명을 거두기를 청하니 따르다
사헌부가 아뢰기를,"인빈 김씨가 돌아갔는데, 특명으로 조시를 3일간 정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인빈은 선조의 한 궁인일 따름이니, 법에 조회를 중지하는 예가 없고, 예에도 역시 근거가 없습니다.
결단코 한때의 사은(私恩)으로 만세에 통행하는 예법을 폐할 수는 없으니, 내리신 명을 거두소서."
하니, 따랐다.
- ↑ 《영조실록》 85권, 영조 31년(1755년 청 건륭(乾隆) 20년) 6월 14일 (병진)
숙의 이씨를 경빈으로 추증하다 - ↑ 효령대군의 현손
- ↑ 신립의 장녀이며, 인헌왕후의 외사촌
- ↑ 정혜옹주 → 윤지 → 윤씨부인 → 김만기 → 인경왕후
- ↑ 유영경의 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