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물 마립간
신라 내물왕(내물 마립간)
新羅 奈勿麻立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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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내물왕릉 | |
제17대 신라 마립간 | |
재위 | 356년 4월 ~ 402년 2월 |
전임 | 흘해이사금(訖解泥師今) |
후임 |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 |
부왕 | 각간 김말구(金末仇) |
이름 | |
휘 | 김내물(金奈勿), 나물(那勿), 나밀(那密) |
신상정보 |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402년 2월 |
부친 | 각간 김말구(金末仇) |
모친 | 휴례부인(休禮夫人) |
배우자 | 보반부인(保反夫人) |
능묘 | 내물왕릉 |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 ~ 402년, 재위: 356년 ~ 402년) 또는 내물이사금(奈勿泥師今)은 신라의 17대 임금으로, 내물왕(奈勿王)이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이고, 구도(仇道) 갈문왕의 자손으로, 아버지는 13대 미추 이사금의 동생인 각간 김말구(金末仇)요, 어머니는 휴례부인 김씨(休禮夫人 金氏)이며, 왕후는 보반부인이다. 보반부인이 미추 이사금의 딸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신뢰하기 어렵다. 다른 이름은 나물(那勿), 나밀(那密)이고 나물왕, 나밀왕이라고도 한다.
그가 미추 이사금의 조카라는 설과 그의 부인인 보반부인이 미추의 딸이라는 설은 그와 미추의 활동기간의 차이로 신뢰가 어렵다.
내물 이사금 재위 시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는 등 지배세력이 강화되어 중앙집권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1] 석씨 가문의 흘해 이사금에 이어 김씨인 내물 이사금이 등극함으로써 이후 김씨의 왕위 계승이 확립되었다. 이는 왕권이 강화되고 안정되어 여타 집단들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하였다.
대외 관계
백제
366년 음력 3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 동맹을 맺었으며[2], 368년 봄에는 백제 근초고왕이 명마 두 필을 보내왔다.[3] 373년 백제의 독산성주가 3백 명의 주민과 함께 투항해오자, 내물 마립간은 이들을 받아들여 진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이에 근초고왕의 항의가 있었으나 내물 마립간은 그들을 돌려보내지 않았다.[4]
고구려
392년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왔으며, 고구려의 세력이 강성해져 내물 마립간은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5] 399년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의 연합공격을 받은 내물 마립간이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요청함으로써 광개토왕은 5만 군사를 보내 가야와 왜군을 물리치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안에 머물기도 하였다. 주변국의 잇단 침공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은 내물 마립간이 몸져눕자 401년 고구려는 볼모로 와있던 실성을 돌려보내 왕위를 잇게 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보다 앞선 고구려의 문화와 고구려를 통한 중국 북조(北朝)의 문화를 도입하며 차차 발전을 하게 되었다.[6]
왜(倭)
364년 음력 4월 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토함산 아래에 허수아비 수천 기를 세워 신라 군사로 위장하고 들녘에 용병을 매복시켜놓았다. 토함산에 신라 군사가 많은 것으로 믿은 왜군은 곧바로 직진하여 들녘으로 향했으나 신라 복병의 뜻하지 않은 공격을 받고 대패하여 달아났다.[7] 393년 음력 5월 왜인이 다시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가 되도록 포위를 풀지 않았다. 군사들은 마립간에게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지만, 마립간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왜군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농성하여, 마침내 왜군이 퇴각하자 2백 기병으로 퇴로를 막고 보병 1천을 내보내 협공함으로써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8]
진(前秦)
381년, 위두(衛頭)를 중국의 진(351년~394년)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진의 황제 부견(재위 357년~ 385년)이 묻기를 "해동의 사정을 말하매 언어가 예전과 다르니 어찌 된 일인가?" 하는데 위두가 답하기를 "이는 중국과 동일한 현상이라, 시대가 바뀌며 말과 이름이 변하니 오늘의 말이 어찌 옛과 같겠는가?" 하였다.[9]
죽음
400년 신라는 국가존망의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 | 45년 10월 왕의 어마(御馬)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서럽게 울었다. | ” |
—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이사금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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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볼모까지 보내며 고구려와 제휴하였고, 고구려와의 항쟁에서 열세에 있던 백제는 신라와 경쟁관계였던 가야를 부추겨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던 왜의 소국들을 동원해[10]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하게 하였다. 잇단 천재지변과 왜의 침략으로 국력이 소진된[11] 신라는 남천 가에서 크게 패하고 가야와 왜의 연합군에게 서라벌까지 함몰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다급해진 내물 마립간은 백제와의 전쟁을 위해 평양[12]에 진주해 있던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요청해 그의 도움으로 겨우 가야와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고구려 덕에 신라는 오랜 숙적 가야를 패퇴시키고 낙동강 하구에 이르는 지역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한동안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주변국의 잇단 침공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아 몸져누운 내물 마립간은 402년 5월에 붕어하여 첨성대 서남쪽으로 그의 능이 조영되었다.[13]
신라 후기에는 그의 방계 후손들이 왕위를 잇게 된다.
가계
관련 문화재
- 경주 내물왕릉 - 사적 제188호
참고
각주
- ↑ 〈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2004.
4세기 말엽인 17대 내물왕(奈勿王) 때부터 지배세력이 강화되어 고대 국가로서의 기초가 잡히기 시작하였다.
- ↑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十一年 春三月 百濟人來聘(11년 봄 3월에 백제인이 와서 예방하였다. )
- ↑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十三年 春 百濟遣使 進良馬二匹(13년 봄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바쳤다. )
- ↑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十八年 百濟禿山城主 率人三百來投 王納之 分居六部 百濟王移書曰 兩國和好 約爲兄弟 今大王納我逃民 甚乖和親之意 非所望於大王也 請還之 答曰 民者無常心 故思則來 斁則去 固其所也 大王不患民之不安 而責寡人 何其甚乎 百濟聞之 不復言 夏五月 京都雨魚(18년 백제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300명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으므로 왕이 그들을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니, 백제 왕이 글을 보내 말하였다. 두 나라가 화친을 맺어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었는데, 지금 대왕께서 우리의 도망한 백성을 받아들이니 화친한 뜻에 크게 어긋납니다. 이는 대왕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바라건대 그들을 돌려 보내십시오. [왕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백성은 일정한 마음이 없다. 그러므로 생각나면 오고 싫어지면 가버리는 것은 진실로 그렇기 때문이다. 대왕께서는 백성이 편치 않음은 걱정하지 않고 도리어 과인을 나무라는 것이 어찌 이렇게 심한가? 백제에서 그 말을 듣고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
- ↑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三十七年 春正月 高句麗遣使 王以高句麗強盛 送伊湌大西知子實聖爲質(37년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하였으므로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
- ↑ 〈[[: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삼국의 성립과 발전/신라의 발전#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2004.
제2기 초인 내물왕 때는 왜(倭)의 침입을 자주 당하여 399년(내물왕 44년)에는 광개토왕이 군사를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몰아내는 등 고구려의 보호를 많이 받았고 이 동안에 보다 앞선 고구려의 문화와 또한 고구려를 통하여 중국 북조(北朝)의 문화를 도입하면서 차차 발전을 하게 되었다.
- ↑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九年 夏四月 倭兵大至 王聞之 恐不可敵 造草偶人數千 衣衣持兵 列立吐含山下 伏勇士一千於斧峴東原 倭人恃衆直進 伏發擊其不意 倭人大敗走 追擊殺之幾盡 (9년 여름 4월에 왜의 군사가 대거 침입했다는 소리를 듣고 왕이 두려워 가히 맞서지 못하고,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병사처럼 옷을 입히고 토함산 아래 줄을 세워놓는 동시에 용병 1천을 부현(斧峴)의 동쪽 들판에 숨겨놓았다. 토함산에 신라군사가 많다고 믿은 왜인은 곧바로 들판으로 직진해 왔다. 숨어 있던 병사들의 뜻하지 않은 공격을 받은 왜병들은 대패하여 도주하였고 이들을 추격하여 거의 모든 왜군들을 죽였다.)
- ↑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三十八年 夏五月 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 將士皆請出戰 王曰今賊棄舟深入 在於死地 鋒不可當 乃閉城門 賊無功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步卒一千 追於獨山 夾擊大敗之 殺獲甚衆(38년 여름 5월에 왜인이 와서 금성(金城)을 에워싸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 깊숙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칼날을 당할 수 없다'고 말하고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 성과 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00명을 먼저 보내 돌아가는 길을 막고,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獨山)까지 추격하여 양쪽에서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 ↑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二十六年 ... 遣衛頭入苻秦 貢方物 苻堅問衛頭曰 卿言海東之事與古不同 何耶 答曰 亦猶中國 時代變革名號改易 今焉得同(26년... 위두(衛頭)를 부씨의 진(秦)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부견(苻堅)이 위두에게 물었다. 경(卿)이 말하는 해동(海東)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으니 어찌된 것인가? [위두가] 대답하였다.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시대가 변혁되고 이름이 바뀌었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 ↑ 생존 위해 왜를 이용했던 가야 소국들
- ↑ 이전까지의 일련의 왜란도 가야의 사주에 의해서였다는 설이 있다.
- ↑ 북한 평양직할시
- ↑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四十七年 春二月 王薨(47년 봄 2월에 왕이 죽었다. )
전 대 흘해 이사금 |
제17대 신라 국왕 356년 ~ 402년 |
후 대 실성 마립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