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와 게이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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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체({{lang|ja|大澤}})로도 표기된다. 본명은 오사와 아키라({{후리가나2|大沢 昭|おおさわ あきら}}){{refn|group=주|참고:<ref>《TV 스타 명감 2011》(2010년, 도쿄 뉴스 통신사 발행)에 게재된 사망자 목록</ref>}}, 구 등록명은 오사와 마사요시({{후리가나2|大沢 昌芳|おおさわ まさよし}})이다. |
구자체({{lang|ja|大澤}})로도 표기된다. 본명은 오사와 아키라({{후리가나2|大沢 昭|おおさわ あきら}}){{refn|group=주|참고:<ref>《TV 스타 명감 2011》(2010년, 도쿄 뉴스 통신사 발행)에 게재된 사망자 목록</ref>}}, 구 등록명은 오사와 마사요시({{후리가나2|大沢 昌芳|おおさわ まさよし}})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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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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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 시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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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3월 14일 가나가와현 가타세에서 태어나<ref name="mainichi19811129">サンデー毎日1981年11月29日号「ザ・ふぇいす ケンカ人生 『来年こそ巨人をぶちのめせ』」p42-p46</ref> 맏형 [[오사와 기요시|기요시]], 둘째 형 [[오사와 기미오|기미오]]의 영향도 있어서 야구를 시작하게 됐다. 야구 외에 [[스모]], [[육상]] 등 다른 스포츠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ref name="mainichi19811129"/> 학창 시절에는 장난기가 있을 정도의 성격이 있었다. 1945년, 구제 중학교인 히라쓰카 공업학교에 입학했으나{{sfn|오사와 게이지|1985|p=11}} 학교 안팎에서 폭력 사건을 자주 일으키는 데다 현지에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깡패 기질이 있는 사람을 상대로 싸움을 일으키는 등 경찰이 찾아올 정도의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어 이 일로 인해 퇴학당했다.{{sfn|오사와 게이지|1985|p=29}} 1947년 4월에 맏형이자 [[주니치 드래건스|주부니혼군]] 소속 프로 야구 선수였던 기요시의 주선으로 맏형의 모교인 가나가와 현립 상공고등학교에 2학년으로 재입학했다.{{sfn|오사와 게이지|1985|p=29}} 맏형의 간곡한 설득한 끝에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야구에 몰두하기로 결심했다.{{sfn|오사와 게이지|1985|p=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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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때 하계 고시엔 가나가와현 대회(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가나가와 대회) 예선 결승에서 [[사사키 신야]]가 소속된 쇼난 고등학교에게 패했는데{{sfn|오사와 게이지|1985|p=35}} 이 해의 쇼난 고등학교는 고시엔 대회(제31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전국 제패를 달성했다. 2학년 때인 1950년 여름에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여 가나가와현 대회에서 승리하여 우승해, 학교 창설 이래 처음으로 고시엔 대회 출전을 이뤘다.{{sfn|오사와 게이지|1985|p=38}} 1차전에서는 센다이 제1고등학교([[미야기현]])에게 대승을 거두었지만 2차전에서는 우쓰노미야 공업고등학교([[도치기현]])의 간다 마사오(훗날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다이요 웨일스]]에 입단), [[요시나리 다케오]]의 배터리에 막혀 패했다. 같은 해 추계 간토 대회 가나가와현 예선에서 결승에 진출했지만 쇼난 고등학교의 에이스였던 [[모로키 스케히로]]에게 막혀 팀은 탈락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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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이던 1951년에는 하계 고시엔 대회 가나가와현 예선 2차전에서 즈시카이세이 고등학교와 맞붙었는데, 이 경기에서 자신있게 던진 스트라이크를 볼로 판정을 받거나 확실히 세이프하다고 생각한 터치 플레이를 두 번이나 아웃당하는 등 구심의 판정에 불복했다. 경기는 연장전으로 넘어가면서 막판에는 밀어내기 볼넷으로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 분이 풀리지 않은 오사와는 경기 종료 후 구장 화장실에서 우연히 주심을 만나 다른 동료 선수 한 명과 함께 대뜸 주심을 향해 발로 걷어차는 등의 폭행을 저질러 가나가와 상공고등학교 야구부는 1년 간 출전 정지 징계를 받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훗날 오사와에게서 피해를 당한 주심이 자택을 방문하여 자신이 [[릿쿄 대학]] 경식 야구부 선배라고 밝힌 뒤 “릿쿄 대학에는 자네처럼 야구를 잘하면서도 승부 근성과 운동 능력이 있는 선수가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말해 스카웃 됐다.{{sfn|오사와 게이지|1985|p=45-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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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특기생 추천을 받고 릿쿄 대학 문학부에 진학하여 [[도쿄 6대학 야구 연맹|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는 1학년 춘계 리그전부터 [[외야수]]로서 출전했지만 직후에 [[시마오카 기치로]] [[메이지 대학]] 감독이 ‘출신 고교가 1년 간 출전 정지 처분을 받고 있는 와중에 오사와가 출전한 것 자체가 이상하다’라며 이의를 제기했고, 그 결과 모교인 가나가와 상공고등학교의 징계가 해제될 때까지 그 사이에 오사와도 출전 정지 처분을 받았다.{{sfn|오사와 게이지|1985|p=52-53}} 1953년 춘계 리그에서는 에이스 고지마 구니카즈(훗날 [[:ja:東京ガス硬式野球部|도쿄 가스]]에서 활약)를 이끌고 우승을 경험했다. 같은 해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도 결승전에서는 [[아나부키 요시오]] 등이 소속된 [[주오 대학]]을 누르고 첫 우승을 장식했다. 그 후에는 메이지 대학, [[와세다 대학]]의 ‘양강 시대’가 되면서 우승에는 이르지 못했다. 리그 통산 94경기에 출전하여 314타수 80안타, 타율 0.255, 2홈런, 32타점을 기록했고 베스트 나인을 두 차례나 차지했다. 3학년이던 1954년 추계 리그인 [[도쿄 대학]]과의 경기에서는 [[좌익수]]로서 좌익 땅볼이라는 보기 드문 기록을 남겼다. 상대 타자 하라다 야스오가 좌익수 앞으로 안타성 타구를 날렸는데 오사와는 정위치보다 약간 앞에서 지키고 있던 터라 타구를 원바운드로 잡아내자마자 곧바로 1루로 송구하여 타자 주자를 아웃시켰다.{{sfn|프로 야구 삼국지|1992|p=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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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동기로는 [[호사카 유키나가]], [[후루타 마사유키]], 1년 후배인 [[아즈마 미노루]], [[호리모토 리쓰오]], [[야토 다카오]], 2년 후배로는 훗날 ‘릿쿄 3인방’이라고 불리는 [[나가시마 시게오]], [[스기우라 다다시]], [[모토야시키 긴고]] 등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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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릿쿄 대학 감독인 [[스나오시 구니노부]]는 연습에서 실수를 하는 부원에게 방망이로 머리를 내리쳐서 고막이 터지도록 구타했고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로 허벅지에 피가 나올 정도로 걷어차는 등의 과격할 정도의 폭력적인 훈련 방식을 일삼았다.{{sfn|오사와 게이지|1985|p=63-64}} 오사와는 이러한 스나오시의 훈련 방식에 견디지 못한 나가시마, 스기우라 등의 하급생들로부터 ‘감독이 그만두든지, 아니면 우리가 그만두든지 둘 중 하나’라고 간청했다. 오사와는 스나오시를 직접 만나 스기우라를 비롯한 하급생들의 의견을 피력했지만 스나오시는 “내가 반성할 필요가 어디 있어? 너희들이 같이 야구를 그만둬도 상관없어. 나는 내 방식을 바꾸지 않겠다”{{sfn|오사와 게이지|1985|p=69}}라고 거절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OB회를 통해서 스나오시는 감독직에서 사임하게 됐는데 이로써 오사와는 “‘스나오시 감독 배척 운동’의 주모자”라는 꼬리표를 달게 됐다.{{sfn|오사와 게이지|1985|p=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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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사와는 훗날 “젊은 객기라해도 내가 한 행동은 은사에게 취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라고 반성했다.{{sfn|오사와 게이지|1985|p=70}} 스나오시와는 훗날 앙금은 없어졌다고 하며 1992년 말에는 오사와가 직접 앞장서서 야구부 OB들을 모아놓고 스나오시를 위한 모임을 개최했다.{{sfn|오사와 게이지|1994|p=107-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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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 야구 선수 시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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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난카이 호크스]]에 계약금 400만 엔, 연봉 120만 엔으로 입단했다.{{sfn|오사와 게이지|1996|p=39}} 대학 3학년 때부터 난카이를 비롯해 [[다이에이 유니온스|다이에이 스타스]],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고쿠테쓰 스왈로스]] 등의 여러 프로 구단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지만{{sfn|오사와 게이지|1996|p=35}} 4학년 때 난카이 감독인 [[쓰루오카 가즈토]]로부터 “이봐, 오사와. 난카이 호크스는 아무래도 일본 최고의 팀이 될 수 없다. 거기서 자네와 나가시마, 스기우라까지 세 명의 힘을 빌리고 싶다. 나를 남자로 만들어달라”{{sfn|오사와 게이지|1996|p=37}}라고 말하여 오사와는 ‘나를 남자로 만들어달라’라는 말에 감명받아 난카이에 입단하기로 결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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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오사와는 나가시마, 스기우라와 함께 이 부분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두 사람은 졸업 후 선배가 있는 난카이에 입단하겠다고 약속했다.{{sfn|오사와 게이지|1996|p=38}} 난카이 전철의 터미널 바로 앞에 위치한 난바 구장에 깊은 인상을 받은 나가시마 쪽이 오히려 적극적이었다. 오사와는 난카이 입단 후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는 두 사람을 에워싸는 의미도 있어 ‘영양비’라는 명목으로 매달 2만 엔을 주고 있었는데 이 돈은 쓰루오카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나가시마는 4학년 때 갑자기 태도를 바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겠다고 결심했다. 이에 체면이 구긴 오사와는 분노했고 쓰루오카와 함께 나가시마를 도쿄에 있는 작은 초밥집으로 불러내서 속내를 묻자, 나가시마는 ‘제발 요미우리에 입단시켜달라’며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허를 찔린 오사와는 잠시 움찔했지만 위에서 말한 경위와 쓰루오카가 보는 앞에서 ‘이 한심한 인간아, 어떻게 지금 그런 식으로 말을 할 수 있는건가’라고 말했지만 쓰루오카는 오사와에게 ‘이제 그만해’라고 말하며 제지했다. 쓰루오카는 조용히 “나가시마, 너한텐 인연이 없었구나”라고 덧붙이며 나가시마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sfn|오사와 게이지|1996|p=57}} 쓰루오카에 대한 오사와의 존경과 충성심은 절대적인 반면 나가시마에 대한 불신감은 오랫동안 지속됐다. 또한 오사와는 나가시마처럼 스기우라도 마음이 바뀔 것을 우려하여 스기우라를 만나는데 스기우라는 “나를 그런 사람으로 보이는가, 약속대로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하겠다”라고 대답하여 오사와를 안심시켰다.{{sfn|오사와 게이지|1996|p=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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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선수로서는 두뇌적인 수비로 이름을 떨쳤는데 1년째부터 주전 [[좌익수]] 자리를 차지하여 85경기에 선발 출전했다. 비록 규정 타석에는 채우지 못했지만 같은 해 [[1956년 일본 프로 야구 올스타전|올스타전]]에도 출전했다.<ref>広瀬叔功著、南海ホークス ナンバ栄光と哀しみの故郷 (追憶の球団)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2014年、p48</ref> 1958년, 원래 [[1루수]]였던 [[하세가와 시게오]]가 외야에 전념하면서 주전 1루수 자리를 놓고 경쟁했기 때문에 내야수로도 기용됐다. 그해에는 [[2루수]]로서 11경기에, [[3루수]], [[유격수]]로서 각각 4경기에 선발 출전했다. 1959년에는 외야수 준주전으로서 리그 우승에 힘을 보탰고 과거 네 차례의 맞대결에서 매번 고배를 마신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959년 일본 시리즈|일본 시리즈]]에서는 4연투 4연승으로 주목받고 있는 스기우라에게 양보하여 공수에서 막강한 활약을 보인 난카이를 창단 첫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미도스지]] 퍼레이드에서 팬들의 성원에 눈물로 답례하고 있는 쓰루오카의 모습을 지켜본 오사와는 ‘남자의 약속’을 이뤄내는 만족감에 젖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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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는 5타수 2안타 1타점을 기록하면서도 2차전 이후에는 중견수 하세가와 시게오를 대신해서 경기 후반에 대수비로 교체 투입됐다. 타자의 성향에 따라 수비 위치를 수시로 바꾸는 등 현재로서는 당연해진 플레이를 선보였고 요소요소에서 보여준 호수비로 요미우리의 반격을 끊어내고 팀의 4연승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3차전에서는 7회말에 선두 타자 나가시마 시게오의 우중간으로의 큰 타구를 잡아내는 예리한 판단을 내렸다. 게다가 9회말에는 요미우리에게 동점으로 쫓기면서 또다시 1사 2·3루의 안타 한 방이면 끝내기 패배가 될 수도 있다는 위기 상황에서 [[모리 마사아키 (야구인)|모리 마사히코]]의 좌중간으로 살짝 얕은 라이너성 타구를 또다시 예리한 판단력으로 잡아냈고 홈으로 향하는 3루 주자 [[히로오카 다쓰로]]를 아웃시키는 등 연이은 호수비를 선보였다.{{sfn|프로 야구 삼국지|1992|p=120}} 실제 경기 사진을 확인해보면 오사와는 20m 이상의 수비 위치를 이동시킨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수비 위치 변경에 대해 전력분석원이었던 [[오와리 히사쓰구]]가 요미우리를 분석한 ‘오와리 메모’의 존재가 지적되는 경우가 있는데 오사와는 ‘메모의 내용을 몰랐다’고 부인하며 자신의 직감으로 움직였다고 말했다.{{sfn|오사와 게이지|1996|p=80}} 또한 나중에 공개된 메모의 내용과 오사와의 수비를 대조하여 메모와 다른 판단을 내린 것으로 밝혀졌다.<ref>[http://www.sponichi.co.jp/baseball/special/yakyu-jin/keiji-osawa/KFullNormal20070325176.html {{lang|ja|職業野球人・大沢啓二4.尾張メモ}}] - 스포니치아넥스</ref> 일본 시리즈 종료 후 평소에 선수들을 칭찬하지 않는 쓰루오카가 ‘오사와, 정말 잘했어’라고 말했고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니시테쓰]]의 [[미하라 오사무]] 감독은 “MVP를 차지한 스기우라는 부상으로 중형차를 받았는데 스기우라의 호투를 보이지 않게 도와준 오사와에게도 소형 자동차를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ref>[http://www.sponichi.co.jp/baseball/special/yakyu-jin/keiji-osawa/KFullNormal20070325179.html {{lang|ja|職業野球人・大沢啓二7.元祖親分と魔術師が認めたスーパーサブ}}] - 스포니치아넥스</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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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한 스텝의 잡아내는 스타일이라면 ‘[[게]] 모양으로 달리는 포구’라는 말을 주변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ref>よみがえる1958-69年のプロ野球 別冊ベースボール Part2 1959年編(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2023年4月刊)p48</ref> 또 우전 안타성 타구를 일부러 빠뜨린 척 하면서 펜스를 향해 달려가 정확한 송구로 2루에서 주자를 잡아내는 속임수 플레이를 펼쳤다.{{sfn|오사와 게이지|1996|p=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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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와는 1965년에 난카이에서 뛰면 근속 10년째가 되어 10년 선수 제도에 의해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지만 구단측은 오사와에게 보너스를 지급하지 않았고 1964년 시즌 오프에 갑자기 구단측에서 오사와에게 현역 은퇴와 스카우트 전직을 제의했지만 오사와는 이에 반발하여 거절했고, 선수 생활을 계속하기로 했다.{{sfn|오사와 게이지|1996|p=90}} 그 때 [[지바 롯데 마린스|도쿄 오리온스]]의 구단주인 [[나가타 마사이치]]로부터 “계속 선수 생활을 해주었으면 좋겠고 그 후에는 코치로서 팀을 재건해 주었으면 한다. 침체된 팀에 ‘난카이 정신’을 심어줬으면 하는 바램이다”{{sfn|오사와 게이지|1996|p=94}}라는 입단 제의를 받은 것에 감명받아 도쿄로 이적하여 이듬해인 1965년에는 도쿄에서 활약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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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 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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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롯데 오리온스 감독(1971년 시즌 도중~197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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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33세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하여{{sfn|오사와 게이지|1996|p=101}} 이듬해 1966년부터 도쿄·롯데에서 타격 코치를 맡았는데 1969년부터 1971년 시즌 도중까지 2군 감독을 맡았다. 2군 감독 시절인 1970년에는 이스턴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지도를 받은 [[도쿠쓰 다카히로]]는 “현역 시절에 오사와는 홈런 타자가 아니었지만 애버리지 타자를 잘 키워나갔다. 그래서 내가 애버리지 타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었다”라고 말했다.<ref>『野球小僧 12月号 2011』白夜書房、p.174</ref> 또한 1968년 오프에는 육상 [[단거리 달리기]] 선수였던 [[이지마 히데오]]가 롯데에 입단하는 실마리를 만들어<ref name="sn080407">{{뉴스 인용|url=http://www.sponichi.co.jp/baseball/yomimono/professional_bbd0804/kiji/K20080407Z00001930.html|title=日めくりプロ野球4月 【4月13日】1969年(昭44) 世界初の代走屋・飯島秀雄 デビュー戦で初盗塁|newspaper=스포츠 닛폰 |date=2008-04-07|accessdate=2018-02-17}}</ref> 입단 후에는 1969년 시즌 개막할 때까지 일대일로 지도했다.<ref name="usami">宇佐美徹也『プロ野球記録大鑑 <昭和11年 - 平成4年>』講談社、1993年、p.716</ref> 1971년, 2군에 내려간 이지마가 경기에 출전했을 때 타석에 들어선 것(대주자 출전 후 타순이 한 바퀴 돌았다<ref name="usami"/>)은 오사와의 의향이었다고 한다.<ref name="sn0804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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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7월 23일, 선두였던 [[오릭스 버펄로스|한큐 브레이브스]]와의 승차가 8경기차로 벌어지면서 구단주인 [[나카무라 나가요시]]는 1군 감독이던 [[노닌 와타루]]를 2군 감독으로 강등시키고 오사와를 1군 감독으로 임명키로 결정했다.<ref>読売新聞1971年7月24日11面「農人ロッテ監督更迭 後任には大沢二軍監督」読売新聞1971年7月p</ref> 7월 24일 기준으로 2위를 기록하여 선두 한큐와는 8경기차였지만 7월 30일부터 [[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니시노미야 구장]]에서 열린 한큐와의 4연전에서 4연승을 기록하여 승차를 0경기차까지 좁혔다.<ref>読売新聞1971年8月2日11面「ロッテの巨砲大当たり あえぐ阪急、無残な8連敗 粘った粘った-『0差』」読売新聞1971年8月p39</ref> 구단은 오사와의 수완을 높이 평가하여 시즌 도중인 8월 3일에 5년 계약을 맺었다.<ref>読売新聞1971年8月4日11面「大沢監督、異例の5年契約」読売新聞1971年8月p93</ref> 시즌 종료 후 ‘타격만으로는 일본 최고의 팀이 될 수 없다’라는 이유로 [[에노모토 기하치]], [[에토 신이치]], [[앨트 로페즈]]를 연쇄적으로 방출하여 [[노무라 오사무]], [[무라카미 기미야스]], [[도야마 요시아키]]를 영입했다. 수비에 어려움이 있는 선수들을 방출하고 그 대가로 젊은 선수들을 영입하는 트레이드를 단행하여 1972년 시즌에 돌입했으나 단 한 번도 상위권에 들지 못한 채 5위로 내려앉는 수모를 겪었다. 작년 시즌에 193개의 홈런을 친 막강한 타선을 해체하면서까지 강화하려던 투수진이 무너지면서 팀 평균 자책점 4.54라는 당시 퍼시픽 리그 최악의 신기록을 세웠다. 시즌 종료 후 구단주가 오사와의 연임을 생각하고 있던 나카무라 나가요시에서 [[신격호]]로 바뀌면서 신격호와 같은 [[재일 한국인]]이면서도 당시 롯데 산하였던 [[도쿄 타임스]]에서 평론가로 활동하여 자신이 운영하는 기획사도 롯데로부터 자금 원조를 받고 있던 [[가네다 마사이치]](이미 일본으로 귀화됨)가 신격호로부터 감독직 제안을 받았다. 오사와의 사임을 주장하고 있던 본사 측에서는 가네다를 영입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고<ref>[https://column.sp.baseball.findfriends.jp/?pid=column_detail&id=097-20210505-01&from=related_info_column {{lang|ja|濃厚になった大沢啓二から金田正一へのロッテ監督交代劇/週べ回顧1972年編}}] - 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2021年5月6日配信、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ref> 일부 임원들이 나카무라가 매수한 [[후쿠오카 야구]]([[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로 옮긴 것에 더해 위약금을 받는 것을 조건으로 5년 계약을 파기하고 해임시켰다. 또한 오사와는 위약금으로 1,500만 엔의 [[수표]]를 받았다고 한다.{{sfn|프로 야구 삼국지|1992|p=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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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를 퇴단한 이후에는 [[RF라디오닛폰|라디오간토]]에서 해설자(1973년~1975년)를 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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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닛폰햄 파이터스 감독, 닛폰햄 상무 시절(1976년~1994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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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10월, [[미하라 오사무]] 구단 사장의 요청을 받고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닛폰햄 파이터스]] 감독으로 취임했다. 3년째인 1978년에 닛폰햄으로서는 처음으로 A클래스(1~3위)에 진입했고 1979년에는 부임 5년 만에 첫 승리를 달성했고 1980년 후기 시즌에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긴테쓰 버펄로스]]와 우승 경쟁을 펼치면서 정규 시즌 최종전이 된 10월 7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긴테쓰전에서는 무승부라도 우승을 차지한다는 중요한 경기를 치렀지만 5대 6으로 패했다. 닛폰햄은 모든 일정을 종료해서 긴테쓰의 남은 경기 결과에 따라 후기 우승 가능성도 남아 있었지만 긴테쓰가 정규 시즌 최종전인 10월 11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세이부]]전에서 10대 4로 승리하여 후기 우승을 달성했고 닛폰햄은 우승을 놓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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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 6년 째인 1981년에 후기 우승을 달성하고 플레이오프에서도 전기 리그 우승팀인 롯데 오리온스를 누르고 닛폰햄으로서는 1974년 탄생 이후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81년 일본 시리즈|일본 시리즈]]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맞붙으면서 홈구장이 요미우리와 같은 고라쿠엔 구장이었기 때문에 일본 시리즈 사상 최초로 같은 구장에서 치러진 일명 ‘덕아웃 시리즈’가 됐다. 하지만 요미우리에게 2승 4패로 패하여 일본 시리즈 우승을 놓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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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1982년에는 그해 감독으로 취임한 [[히로오카 다쓰로]]가 이끄는 세이부 라이온스가 우승했지만 후기 시즌에는 닛폰햄이 2년 연속으로 우승했다. 하지만 우승 직전인 9월 8일, 이 해에 20승을 거두어 에이스로 성장하여 전기 리그 우승팀인 세이부를 상대로 6승을 기록한 [[구도 미키오]]가 오른쪽 손가락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으면서 10월 세이부와의 플레이오프 등판은 희망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담당 의사로부터 ‘플레이오프에는 늦지 않는다’라고 듣고서는 오사와가 한 가지 안을 짜서 플레이오프 실전까지 구도는 다친 채로 있다고 숨겼다. 오사와의 작전은 성공했고 10월 9일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 오른쪽 손가락 골절로 경기에 출전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됐던 구도가 선발 등판하여 대전 상대인 세이부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세이부에게 1승 3패로 패하며 2년 연속 리그 우승에는 실패했다. 또한 구도는 이 일로 인해 선수 생명을 단축시켰다고 알려졌는데, 제1기 감독 시절 초기에 에이스로 활약하며 닛폰햄을 거쳐 히로시마에서 뛰다가 1982년 시즌 도중에 세이부로 이적한 [[다카하시 나오키 (야구인)|다카하시 나오키]]는 ‘닛폰햄에서는 [[기다 이사무|기다]]와 구도가 1년 만에 망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ref>読む野球-9回勝負-No.8、2015年、P80、主婦の友社</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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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에는 3위로 시즌을 마치면서 1978년부터 6년 연속으로 A클래스에 진입했지만 오사와는 구단주였던 [[오코소 요시노리]]에게 이번 시즌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나 팀을 떠나겠다고 말했다. 오코소는 사임을 받아들였지만 향후 프런트의 간부로서 구단에 남아달라고 부탁했는데 오사와는 입장을 번복하여 구단에 남아 육성부장으로 발탁됐다.{{sfn|오사와 게이지|1996|p=186-187}} 후임 감독에는 오사와가 추천한 1군 투수 코치였던 [[우에무라 요시노부]]가 부임했는데 이듬해인 1984년에 개막 이후부터 팀은 최하위에 머물 정도로 침체에 빠지면서 우에무라는 시즌 도중인 6월 28일에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오코소로부터 우에무라를 추천한 책임을 지고 남은 경기를 지휘해달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다시 감독으로 복귀했지만 정작 후반기에서 구단 최악의 기록인 14연패를 기록하는 등 팀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고 1975년 이후 9년 만에 최하위로 시즌을 마쳤다.{{sfn|오사와 게이지|1996|p=188-1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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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부터 프런트에 돌아와 1992년까지는 구단 상무이사를 지냈다.<ref>https://web.archive.org/web/20101010034530/http://www.fighters.co.jp/news/detail/1632.html</ref> 1986년에는 2군 투수 코치로 [[무라카미 마사노리]]를 초빙했다. 무라카미는 [[마쓰우라 히로아키]]를 1군에 내보냈고, 마쓰우라는 1988년에 시즌 15승을 올려 [[일본 프로 야구 최다 승리|다승왕]] 타이틀을 차지했다.<ref>スポーツニッポン2016年7月30日村上雅則の我が道</ref> 1986년 경에 《[[프라이데이 (잡지)|프라이데이]]》, 《포커스》(이하 ‘FF’) 등의 사진 주간지가 프로 야구 선수를 포함한 유명인들의 사생활을 게재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됐지만 닛폰햄 선수가 등장하지 않은 것을 한탄하며 “‘FF’에 실려달라!”(‘FF’에 표적이 되는 선수가 돼달라는 의미로)라고 선수들을 꾸짖은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구단 상무 시절에 닛폰햄의 경기를 관전하러 [[도쿄 돔]]에 방문했을 때 당시 《프로 야구 뉴스》 캐스터였던 [[나카이 미호]]([[후지 TV]] 아나운서)로부터 “상무님은 야구의 룰을 알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받는 순간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는 후일담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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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에는 [[도바시 마사유키]]가 감독으로 취임했지만 팀은 5위로 마쳤다. 2년 계약이었지만 구단은 도바시를 해임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ref name="名前なし_2-20231105132123">오사와 게이지(1996), p.217-218</ref> 이에 대해 오사와는 “1년 만에 그만두게 하면 팀의 정신력에 영향을 미치고 회사의 이미지도 나빠진다. 팀 성적이 나쁜 것을 놓고 도바시의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선수들에게도 책임은 있다. 내가 양쪽 다 얘기해볼 테니까 1년 만 더 지휘봉을 잡게 만들어 달라”며 도바시의 해임을 끝까지 반대했었다.<ref name="名前なし_2-20231105132123"/> 하지만 선수와 코칭 스태프들이 도바시가 계속 감독을 맡는 것에 반대를 했기 때문에 궁지에 몰리게 되자, 도바시가 결국 감독직을 내려놓게 됐다.<ref name="名前なし_2-20231105132123"/> 오사와는 후임 감독으로 [[오 사다하루]]와 [[우에다 도시하루]]를 영입하려고 했으나 사다하루는 [[세계 소년 야구 추진 재단]]의 업무가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우에다에 대해서는 구단 관계자가 ‘[[간사이 지방]] 출신의 감독으로는 인기가 없다’고 난색을 표시했다고 한다.{{sfn|오사와 게이지|1996|p=219}}<ref group="주">우에다는 닛폰햄의 창업지였던 [[도쿠시마현]] 출신이라서 오코소로서는 개인적으로 호감을 가졌었지만 이 때는 다른 간부의 의견을 존중해서 우에다에게 요청하는 것을 포기하고 최종적으로 오사와에게 감독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오사와의 후임으로 우에다가 1995년에 취임할 당시에는 오코소가 직간접적으로 요청하여 오너 인사에 가까운 방식으로 결정했다.</ref> 오사와는 “인기 있는 사람을 원한다면 [[미야자와 리에]]라도 불러와라”라고 분노했지만 이후에도 후임 감독 선정에 난항을 겪게 되자 구단 프런트의 요청을 받고 오코소 구단주로부터 직접 설득받은 일도 있어서 오사와가 감독직에 복귀하게 됐다.{{sfn|오사와 게이지|1996|p=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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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감독으로 복귀한 1993년에는 전년도에 부진했던 선발 로테이션을 재정비했는데 마무리 투수를 맡은 [[시라이 야스카쓰]]를 빈약한 선발로 재전향했고 시라이를 대신하는 마무리 투수로서 신인이던 [[야마하라 가즈토시]]를 발탁했지만 후에 부진으로 기권했다. 대역으로서 전년도에 14승으로 로테이션을 지켜내면서도 부진으로 슬럼프에 빠져있던 [[가네이시 아키히토]]를 구원으로 전향시키자, 팀내 1위인 13세이브를 기록하며 평균 자책점 2.09로 성공시켰다. 주로 대수비 요원으로 활약하던 [[히로세 데쓰로]]를 주전 유격수로 기용하여 팀의 주장으로도 발탁시켰다. [[다나카 유키오 (1967년)|다나카 유키오]], [[니시자키 유키히로]]의 부활과 [[릭 슈]]의 맹활약도 있어서 세이부와 치열한 순위 경쟁을 펼친 끝에 1경기차로 리그 2위로 올라섰다. 지바 롯데전에서 [[이라부 히데키]]를 막아낸 경기 종료 후에 “마쿠하리 해변의 이라부 [[해파리]]에 쏘여 버렸다”라는 말을 남기는 등 경기가 끝난 후 자신의 재치와 유머 넘치는 발언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등 큰 화제를 불러일으켜 ‘오야붕’({{lang|ja|親分}})이라는 단어는 그해 [[신어·유행어 대상]]의 ‘대중어 부문·금상’에 선정됐다. 하지만 이듬해 1994년에는 주력 투수와 타자들의 부상이 속출하는 등 악재가 겹쳐 최하위(6위)로 떨어졌다. 5개 구단 모두에게 지면서 타율, 득점, 안타, 타점, 평균 자책점, 실점, 도루 모두 리그 최하위를 기록하여 전년도보다 성적이 크게 떨어졌다. 9월 29일, 홈구장인 도쿄 돔에서의 최종전이 끝난 후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마친 직후 팬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sfn|오사와 게이지|1996|p=246}} 이 해를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동시에 닛폰햄을 퇴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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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단 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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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부터 프리랜서 평론가, [[일본 프로 야구 OB클럽]](전국 야구 진흥회) 이사장(2009년 3월까지. 그해 4월부터는 명예 이사장으로 취임),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 위원회 의장, ‘모르츠 구단’ 감독·총감독, [[쇼리키 마쓰타로상]] 선정위원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TBS 텔레비전|TBS]] 계열 프로그램 《선데이 모닝》의 코너 ‘주간 어의견번’(1997년경 시작<ref>《야큐코조》2010년 12월호 104-107페이지에 게재된 ‘연표로 보는 프로 야구 뉴스와 그 시대’에서 연표의 ‘사회 정세’항목을 참조. 106페이지에 게재된 1987년의 《선데이 모닝》 시작과 세트로 ‘주간 어의견번’ 코너 시작 시기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술돼 있음.</ref>)에 [[하리모토 이사오|하리모토 이사오]]와 함께 고정 출연했다. [[닛폰 방송]] 《오하요! 닛폰 전국 소방단》(2006년 4월 시작)에서는 소방 응원단장의 직함으로 게스트로 출연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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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에 [[담낭암]] 진단을 받아 프로그램 등에서는 투병 중인 상황에서 출연하고 있었다. 2010년 9월 26일과 10월 3일에 2회 연속으로 《선데이 모닝》에 출연하지 않았고 9월 26일에는 자세한 이유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10월 3일에 자신이 보낸 편지를 [[세키구치 히로시]]가 소개하여 그 내용 중에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밝혔다. 10월 7일 오전 7시 25분에 담낭암으로 사망했다(향년 7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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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 정보 == |
== 상세 정보 == |
2024년 4월 1일 (월) 16:4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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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올스타전 당시의 오사와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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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일본 | |||
생년월일 | 1932년 3월 14일 | |||
출신지 |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 | |||
사망일 | 2010년 10월 7일 | (78세)|||
신장 | 173 cm | |||
체중 | 77 kg | |||
선수 정보 |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
수비 위치 | 외야수 | |||
프로 입단 연도 | 1956년 | |||
첫 출장 | 1956년 3월 24일 | |||
마지막 경기 | 1965년 10월 8일 | |||
경력 | ||||
선수 경력 감독·코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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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와 게이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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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식 한자 표기 | 大沢 啓二 |
가나 표기 | おおさわ けいじ |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 | 오사와 게이지 |
통용식 표기 | 오오사와 케이지 |
로마자 | Keiji Ōsawa |
오사와 게이지(일본어: 大沢 啓二, 1932년 3월 14일~2010년 10월 7일)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 야구 해설가·평론가이다.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 출신[1]이며 현역 시절 포지션은 외야수였다.
구자체(大澤)로도 표기된다. 본명은 오사와 아키라(
인물
학창 시절
1932년 3월 14일 가나가와현 가타세에서 태어나[3] 맏형 기요시, 둘째 형 기미오의 영향도 있어서 야구를 시작하게 됐다. 야구 외에 스모, 육상 등 다른 스포츠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3] 학창 시절에는 장난기가 있을 정도의 성격이 있었다. 1945년, 구제 중학교인 히라쓰카 공업학교에 입학했으나[4] 학교 안팎에서 폭력 사건을 자주 일으키는 데다 현지에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깡패 기질이 있는 사람을 상대로 싸움을 일으키는 등 경찰이 찾아올 정도의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어 이 일로 인해 퇴학당했다.[5] 1947년 4월에 맏형이자 주부니혼군 소속 프로 야구 선수였던 기요시의 주선으로 맏형의 모교인 가나가와 현립 상공고등학교에 2학년으로 재입학했다.[5] 맏형의 간곡한 설득한 끝에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야구에 몰두하기로 결심했다.[6]
1학년 때 하계 고시엔 가나가와현 대회(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가나가와 대회) 예선 결승에서 사사키 신야가 소속된 쇼난 고등학교에게 패했는데[7] 이 해의 쇼난 고등학교는 고시엔 대회(제31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전국 제패를 달성했다. 2학년 때인 1950년 여름에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여 가나가와현 대회에서 승리하여 우승해, 학교 창설 이래 처음으로 고시엔 대회 출전을 이뤘다.[8] 1차전에서는 센다이 제1고등학교(미야기현)에게 대승을 거두었지만 2차전에서는 우쓰노미야 공업고등학교(도치기현)의 간다 마사오(훗날 다이요 웨일스에 입단), 요시나리 다케오의 배터리에 막혀 패했다. 같은 해 추계 간토 대회 가나가와현 예선에서 결승에 진출했지만 쇼난 고등학교의 에이스였던 모로키 스케히로에게 막혀 팀은 탈락했다.
3학년이던 1951년에는 하계 고시엔 대회 가나가와현 예선 2차전에서 즈시카이세이 고등학교와 맞붙었는데, 이 경기에서 자신있게 던진 스트라이크를 볼로 판정을 받거나 확실히 세이프하다고 생각한 터치 플레이를 두 번이나 아웃당하는 등 구심의 판정에 불복했다. 경기는 연장전으로 넘어가면서 막판에는 밀어내기 볼넷으로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 분이 풀리지 않은 오사와는 경기 종료 후 구장 화장실에서 우연히 주심을 만나 다른 동료 선수 한 명과 함께 대뜸 주심을 향해 발로 걷어차는 등의 폭행을 저질러 가나가와 상공고등학교 야구부는 1년 간 출전 정지 징계를 받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훗날 오사와에게서 피해를 당한 주심이 자택을 방문하여 자신이 릿쿄 대학 경식 야구부 선배라고 밝힌 뒤 “릿쿄 대학에는 자네처럼 야구를 잘하면서도 승부 근성과 운동 능력이 있는 선수가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말해 스카웃 됐다.[9]
체육특기생 추천을 받고 릿쿄 대학 문학부에 진학하여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는 1학년 춘계 리그전부터 외야수로서 출전했지만 직후에 시마오카 기치로 메이지 대학 감독이 ‘출신 고교가 1년 간 출전 정지 처분을 받고 있는 와중에 오사와가 출전한 것 자체가 이상하다’라며 이의를 제기했고, 그 결과 모교인 가나가와 상공고등학교의 징계가 해제될 때까지 그 사이에 오사와도 출전 정지 처분을 받았다.[10] 1953년 춘계 리그에서는 에이스 고지마 구니카즈(훗날 도쿄 가스에서 활약)를 이끌고 우승을 경험했다. 같은 해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도 결승전에서는 아나부키 요시오 등이 소속된 주오 대학을 누르고 첫 우승을 장식했다. 그 후에는 메이지 대학, 와세다 대학의 ‘양강 시대’가 되면서 우승에는 이르지 못했다. 리그 통산 94경기에 출전하여 314타수 80안타, 타율 0.255, 2홈런, 32타점을 기록했고 베스트 나인을 두 차례나 차지했다. 3학년이던 1954년 추계 리그인 도쿄 대학과의 경기에서는 좌익수로서 좌익 땅볼이라는 보기 드문 기록을 남겼다. 상대 타자 하라다 야스오가 좌익수 앞으로 안타성 타구를 날렸는데 오사와는 정위치보다 약간 앞에서 지키고 있던 터라 타구를 원바운드로 잡아내자마자 곧바로 1루로 송구하여 타자 주자를 아웃시켰다.[11]
대학 동기로는 호사카 유키나가, 후루타 마사유키, 1년 후배인 아즈마 미노루, 호리모토 리쓰오, 야토 다카오, 2년 후배로는 훗날 ‘릿쿄 3인방’이라고 불리는 나가시마 시게오, 스기우라 다다시, 모토야시키 긴고 등이 있었다.
당시 릿쿄 대학 감독인 스나오시 구니노부는 연습에서 실수를 하는 부원에게 방망이로 머리를 내리쳐서 고막이 터지도록 구타했고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로 허벅지에 피가 나올 정도로 걷어차는 등의 과격할 정도의 폭력적인 훈련 방식을 일삼았다.[12] 오사와는 이러한 스나오시의 훈련 방식에 견디지 못한 나가시마, 스기우라 등의 하급생들로부터 ‘감독이 그만두든지, 아니면 우리가 그만두든지 둘 중 하나’라고 간청했다. 오사와는 스나오시를 직접 만나 스기우라를 비롯한 하급생들의 의견을 피력했지만 스나오시는 “내가 반성할 필요가 어디 있어? 너희들이 같이 야구를 그만둬도 상관없어. 나는 내 방식을 바꾸지 않겠다”[13]라고 거절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OB회를 통해서 스나오시는 감독직에서 사임하게 됐는데 이로써 오사와는 “‘스나오시 감독 배척 운동’의 주모자”라는 꼬리표를 달게 됐다.[14]
하지만 오사와는 훗날 “젊은 객기라해도 내가 한 행동은 은사에게 취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라고 반성했다.[14] 스나오시와는 훗날 앙금은 없어졌다고 하며 1992년 말에는 오사와가 직접 앞장서서 야구부 OB들을 모아놓고 스나오시를 위한 모임을 개최했다.[15]
프로 야구 선수 시절
1956년, 난카이 호크스에 계약금 400만 엔, 연봉 120만 엔으로 입단했다.[16] 대학 3학년 때부터 난카이를 비롯해 다이에이 스타스, 고쿠테쓰 스왈로스 등의 여러 프로 구단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지만[17] 4학년 때 난카이 감독인 쓰루오카 가즈토로부터 “이봐, 오사와. 난카이 호크스는 아무래도 일본 최고의 팀이 될 수 없다. 거기서 자네와 나가시마, 스기우라까지 세 명의 힘을 빌리고 싶다. 나를 남자로 만들어달라”[18]라고 말하여 오사와는 ‘나를 남자로 만들어달라’라는 말에 감명받아 난카이에 입단하기로 결심했다.
동시에 오사와는 나가시마, 스기우라와 함께 이 부분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두 사람은 졸업 후 선배가 있는 난카이에 입단하겠다고 약속했다.[19] 난카이 전철의 터미널 바로 앞에 위치한 난바 구장에 깊은 인상을 받은 나가시마 쪽이 오히려 적극적이었다. 오사와는 난카이 입단 후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는 두 사람을 에워싸는 의미도 있어 ‘영양비’라는 명목으로 매달 2만 엔을 주고 있었는데 이 돈은 쓰루오카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나가시마는 4학년 때 갑자기 태도를 바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겠다고 결심했다. 이에 체면이 구긴 오사와는 분노했고 쓰루오카와 함께 나가시마를 도쿄에 있는 작은 초밥집으로 불러내서 속내를 묻자, 나가시마는 ‘제발 요미우리에 입단시켜달라’며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허를 찔린 오사와는 잠시 움찔했지만 위에서 말한 경위와 쓰루오카가 보는 앞에서 ‘이 한심한 인간아, 어떻게 지금 그런 식으로 말을 할 수 있는건가’라고 말했지만 쓰루오카는 오사와에게 ‘이제 그만해’라고 말하며 제지했다. 쓰루오카는 조용히 “나가시마, 너한텐 인연이 없었구나”라고 덧붙이며 나가시마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20] 쓰루오카에 대한 오사와의 존경과 충성심은 절대적인 반면 나가시마에 대한 불신감은 오랫동안 지속됐다. 또한 오사와는 나가시마처럼 스기우라도 마음이 바뀔 것을 우려하여 스기우라를 만나는데 스기우라는 “나를 그런 사람으로 보이는가, 약속대로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하겠다”라고 대답하여 오사와를 안심시켰다.[21]
프로 선수로서는 두뇌적인 수비로 이름을 떨쳤는데 1년째부터 주전 좌익수 자리를 차지하여 85경기에 선발 출전했다. 비록 규정 타석에는 채우지 못했지만 같은 해 올스타전에도 출전했다.[22] 1958년, 원래 1루수였던 하세가와 시게오가 외야에 전념하면서 주전 1루수 자리를 놓고 경쟁했기 때문에 내야수로도 기용됐다. 그해에는 2루수로서 11경기에, 3루수, 유격수로서 각각 4경기에 선발 출전했다. 1959년에는 외야수 준주전으로서 리그 우승에 힘을 보탰고 과거 네 차례의 맞대결에서 매번 고배를 마신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4연투 4연승으로 주목받고 있는 스기우라에게 양보하여 공수에서 막강한 활약을 보인 난카이를 창단 첫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미도스지 퍼레이드에서 팬들의 성원에 눈물로 답례하고 있는 쓰루오카의 모습을 지켜본 오사와는 ‘남자의 약속’을 이뤄내는 만족감에 젖었다.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는 5타수 2안타 1타점을 기록하면서도 2차전 이후에는 중견수 하세가와 시게오를 대신해서 경기 후반에 대수비로 교체 투입됐다. 타자의 성향에 따라 수비 위치를 수시로 바꾸는 등 현재로서는 당연해진 플레이를 선보였고 요소요소에서 보여준 호수비로 요미우리의 반격을 끊어내고 팀의 4연승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3차전에서는 7회말에 선두 타자 나가시마 시게오의 우중간으로의 큰 타구를 잡아내는 예리한 판단을 내렸다. 게다가 9회말에는 요미우리에게 동점으로 쫓기면서 또다시 1사 2·3루의 안타 한 방이면 끝내기 패배가 될 수도 있다는 위기 상황에서 모리 마사히코의 좌중간으로 살짝 얕은 라이너성 타구를 또다시 예리한 판단력으로 잡아냈고 홈으로 향하는 3루 주자 히로오카 다쓰로를 아웃시키는 등 연이은 호수비를 선보였다.[11] 실제 경기 사진을 확인해보면 오사와는 20m 이상의 수비 위치를 이동시킨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수비 위치 변경에 대해 전력분석원이었던 오와리 히사쓰구가 요미우리를 분석한 ‘오와리 메모’의 존재가 지적되는 경우가 있는데 오사와는 ‘메모의 내용을 몰랐다’고 부인하며 자신의 직감으로 움직였다고 말했다.[23] 또한 나중에 공개된 메모의 내용과 오사와의 수비를 대조하여 메모와 다른 판단을 내린 것으로 밝혀졌다.[24] 일본 시리즈 종료 후 평소에 선수들을 칭찬하지 않는 쓰루오카가 ‘오사와, 정말 잘했어’라고 말했고 니시테쓰의 미하라 오사무 감독은 “MVP를 차지한 스기우라는 부상으로 중형차를 받았는데 스기우라의 호투를 보이지 않게 도와준 오사와에게도 소형 자동차를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25]
자잘한 스텝의 잡아내는 스타일이라면 ‘게 모양으로 달리는 포구’라는 말을 주변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26] 또 우전 안타성 타구를 일부러 빠뜨린 척 하면서 펜스를 향해 달려가 정확한 송구로 2루에서 주자를 잡아내는 속임수 플레이를 펼쳤다.[27]
오사와는 1965년에 난카이에서 뛰면 근속 10년째가 되어 10년 선수 제도에 의해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지만 구단측은 오사와에게 보너스를 지급하지 않았고 1964년 시즌 오프에 갑자기 구단측에서 오사와에게 현역 은퇴와 스카우트 전직을 제의했지만 오사와는 이에 반발하여 거절했고, 선수 생활을 계속하기로 했다.[28] 그 때 도쿄 오리온스의 구단주인 나가타 마사이치로부터 “계속 선수 생활을 해주었으면 좋겠고 그 후에는 코치로서 팀을 재건해 주었으면 한다. 침체된 팀에 ‘난카이 정신’을 심어줬으면 하는 바램이다”[29]라는 입단 제의를 받은 것에 감명받아 도쿄로 이적하여 이듬해인 1965년에는 도쿄에서 활약했다.
은퇴 후
롯데 오리온스 감독(1971년 시즌 도중~1972년)
1965년, 33세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하여[30] 이듬해 1966년부터 도쿄·롯데에서 타격 코치를 맡았는데 1969년부터 1971년 시즌 도중까지 2군 감독을 맡았다. 2군 감독 시절인 1970년에는 이스턴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지도를 받은 도쿠쓰 다카히로는 “현역 시절에 오사와는 홈런 타자가 아니었지만 애버리지 타자를 잘 키워나갔다. 그래서 내가 애버리지 타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었다”라고 말했다.[31] 또한 1968년 오프에는 육상 단거리 달리기 선수였던 이지마 히데오가 롯데에 입단하는 실마리를 만들어[32] 입단 후에는 1969년 시즌 개막할 때까지 일대일로 지도했다.[33] 1971년, 2군에 내려간 이지마가 경기에 출전했을 때 타석에 들어선 것(대주자 출전 후 타순이 한 바퀴 돌았다[33])은 오사와의 의향이었다고 한다.[32]
1971년 7월 23일, 선두였던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승차가 8경기차로 벌어지면서 구단주인 나카무라 나가요시는 1군 감독이던 노닌 와타루를 2군 감독으로 강등시키고 오사와를 1군 감독으로 임명키로 결정했다.[34] 7월 24일 기준으로 2위를 기록하여 선두 한큐와는 8경기차였지만 7월 30일부터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열린 한큐와의 4연전에서 4연승을 기록하여 승차를 0경기차까지 좁혔다.[35] 구단은 오사와의 수완을 높이 평가하여 시즌 도중인 8월 3일에 5년 계약을 맺었다.[36] 시즌 종료 후 ‘타격만으로는 일본 최고의 팀이 될 수 없다’라는 이유로 에노모토 기하치, 에토 신이치, 앨트 로페즈를 연쇄적으로 방출하여 노무라 오사무, 무라카미 기미야스, 도야마 요시아키를 영입했다. 수비에 어려움이 있는 선수들을 방출하고 그 대가로 젊은 선수들을 영입하는 트레이드를 단행하여 1972년 시즌에 돌입했으나 단 한 번도 상위권에 들지 못한 채 5위로 내려앉는 수모를 겪었다. 작년 시즌에 193개의 홈런을 친 막강한 타선을 해체하면서까지 강화하려던 투수진이 무너지면서 팀 평균 자책점 4.54라는 당시 퍼시픽 리그 최악의 신기록을 세웠다. 시즌 종료 후 구단주가 오사와의 연임을 생각하고 있던 나카무라 나가요시에서 신격호로 바뀌면서 신격호와 같은 재일 한국인이면서도 당시 롯데 산하였던 도쿄 타임스에서 평론가로 활동하여 자신이 운영하는 기획사도 롯데로부터 자금 원조를 받고 있던 가네다 마사이치(이미 일본으로 귀화됨)가 신격호로부터 감독직 제안을 받았다. 오사와의 사임을 주장하고 있던 본사 측에서는 가네다를 영입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고[37] 일부 임원들이 나카무라가 매수한 후쿠오카 야구(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로 옮긴 것에 더해 위약금을 받는 것을 조건으로 5년 계약을 파기하고 해임시켰다. 또한 오사와는 위약금으로 1,500만 엔의 수표를 받았다고 한다.[38]
롯데를 퇴단한 이후에는 라디오간토에서 해설자(1973년~1975년)를 맡았다.
닛폰햄 파이터스 감독, 닛폰햄 상무 시절(1976년~1994년)
1975년 10월, 미하라 오사무 구단 사장의 요청을 받고 닛폰햄 파이터스 감독으로 취임했다. 3년째인 1978년에 닛폰햄으로서는 처음으로 A클래스(1~3위)에 진입했고 1979년에는 부임 5년 만에 첫 승리를 달성했고 1980년 후기 시즌에 긴테쓰 버펄로스와 우승 경쟁을 펼치면서 정규 시즌 최종전이 된 10월 7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긴테쓰전에서는 무승부라도 우승을 차지한다는 중요한 경기를 치렀지만 5대 6으로 패했다. 닛폰햄은 모든 일정을 종료해서 긴테쓰의 남은 경기 결과에 따라 후기 우승 가능성도 남아 있었지만 긴테쓰가 정규 시즌 최종전인 10월 11일 세이부전에서 10대 4로 승리하여 후기 우승을 달성했고 닛폰햄은 우승을 놓쳤다.
부임 6년 째인 1981년에 후기 우승을 달성하고 플레이오프에서도 전기 리그 우승팀인 롯데 오리온스를 누르고 닛폰햄으로서는 1974년 탄생 이후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맞붙으면서 홈구장이 요미우리와 같은 고라쿠엔 구장이었기 때문에 일본 시리즈 사상 최초로 같은 구장에서 치러진 일명 ‘덕아웃 시리즈’가 됐다. 하지만 요미우리에게 2승 4패로 패하여 일본 시리즈 우승을 놓쳤다.
이듬해 1982년에는 그해 감독으로 취임한 히로오카 다쓰로가 이끄는 세이부 라이온스가 우승했지만 후기 시즌에는 닛폰햄이 2년 연속으로 우승했다. 하지만 우승 직전인 9월 8일, 이 해에 20승을 거두어 에이스로 성장하여 전기 리그 우승팀인 세이부를 상대로 6승을 기록한 구도 미키오가 오른쪽 손가락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으면서 10월 세이부와의 플레이오프 등판은 희망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담당 의사로부터 ‘플레이오프에는 늦지 않는다’라고 듣고서는 오사와가 한 가지 안을 짜서 플레이오프 실전까지 구도는 다친 채로 있다고 숨겼다. 오사와의 작전은 성공했고 10월 9일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 오른쪽 손가락 골절로 경기에 출전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됐던 구도가 선발 등판하여 대전 상대인 세이부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세이부에게 1승 3패로 패하며 2년 연속 리그 우승에는 실패했다. 또한 구도는 이 일로 인해 선수 생명을 단축시켰다고 알려졌는데, 제1기 감독 시절 초기에 에이스로 활약하며 닛폰햄을 거쳐 히로시마에서 뛰다가 1982년 시즌 도중에 세이부로 이적한 다카하시 나오키는 ‘닛폰햄에서는 기다와 구도가 1년 만에 망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39]
1983년에는 3위로 시즌을 마치면서 1978년부터 6년 연속으로 A클래스에 진입했지만 오사와는 구단주였던 오코소 요시노리에게 이번 시즌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나 팀을 떠나겠다고 말했다. 오코소는 사임을 받아들였지만 향후 프런트의 간부로서 구단에 남아달라고 부탁했는데 오사와는 입장을 번복하여 구단에 남아 육성부장으로 발탁됐다.[40] 후임 감독에는 오사와가 추천한 1군 투수 코치였던 우에무라 요시노부가 부임했는데 이듬해인 1984년에 개막 이후부터 팀은 최하위에 머물 정도로 침체에 빠지면서 우에무라는 시즌 도중인 6월 28일에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오코소로부터 우에무라를 추천한 책임을 지고 남은 경기를 지휘해달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다시 감독으로 복귀했지만 정작 후반기에서 구단 최악의 기록인 14연패를 기록하는 등 팀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고 1975년 이후 9년 만에 최하위로 시즌을 마쳤다.[41]
1985년부터 프런트에 돌아와 1992년까지는 구단 상무이사를 지냈다.[42] 1986년에는 2군 투수 코치로 무라카미 마사노리를 초빙했다. 무라카미는 마쓰우라 히로아키를 1군에 내보냈고, 마쓰우라는 1988년에 시즌 15승을 올려 다승왕 타이틀을 차지했다.[43] 1986년 경에 《프라이데이》, 《포커스》(이하 ‘FF’) 등의 사진 주간지가 프로 야구 선수를 포함한 유명인들의 사생활을 게재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됐지만 닛폰햄 선수가 등장하지 않은 것을 한탄하며 “‘FF’에 실려달라!”(‘FF’에 표적이 되는 선수가 돼달라는 의미로)라고 선수들을 꾸짖은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구단 상무 시절에 닛폰햄의 경기를 관전하러 도쿄 돔에 방문했을 때 당시 《프로 야구 뉴스》 캐스터였던 나카이 미호(후지 TV 아나운서)로부터 “상무님은 야구의 룰을 알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받는 순간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는 후일담도 있다.
1992년에는 도바시 마사유키가 감독으로 취임했지만 팀은 5위로 마쳤다. 2년 계약이었지만 구단은 도바시를 해임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44] 이에 대해 오사와는 “1년 만에 그만두게 하면 팀의 정신력에 영향을 미치고 회사의 이미지도 나빠진다. 팀 성적이 나쁜 것을 놓고 도바시의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선수들에게도 책임은 있다. 내가 양쪽 다 얘기해볼 테니까 1년 만 더 지휘봉을 잡게 만들어 달라”며 도바시의 해임을 끝까지 반대했었다.[44] 하지만 선수와 코칭 스태프들이 도바시가 계속 감독을 맡는 것에 반대를 했기 때문에 궁지에 몰리게 되자, 도바시가 결국 감독직을 내려놓게 됐다.[44] 오사와는 후임 감독으로 오 사다하루와 우에다 도시하루를 영입하려고 했으나 사다하루는 세계 소년 야구 추진 재단의 업무가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우에다에 대해서는 구단 관계자가 ‘간사이 지방 출신의 감독으로는 인기가 없다’고 난색을 표시했다고 한다.[45][주 2] 오사와는 “인기 있는 사람을 원한다면 미야자와 리에라도 불러와라”라고 분노했지만 이후에도 후임 감독 선정에 난항을 겪게 되자 구단 프런트의 요청을 받고 오코소 구단주로부터 직접 설득받은 일도 있어서 오사와가 감독직에 복귀하게 됐다.[46]
두 번째 감독으로 복귀한 1993년에는 전년도에 부진했던 선발 로테이션을 재정비했는데 마무리 투수를 맡은 시라이 야스카쓰를 빈약한 선발로 재전향했고 시라이를 대신하는 마무리 투수로서 신인이던 야마하라 가즈토시를 발탁했지만 후에 부진으로 기권했다. 대역으로서 전년도에 14승으로 로테이션을 지켜내면서도 부진으로 슬럼프에 빠져있던 가네이시 아키히토를 구원으로 전향시키자, 팀내 1위인 13세이브를 기록하며 평균 자책점 2.09로 성공시켰다. 주로 대수비 요원으로 활약하던 히로세 데쓰로를 주전 유격수로 기용하여 팀의 주장으로도 발탁시켰다. 다나카 유키오, 니시자키 유키히로의 부활과 릭 슈의 맹활약도 있어서 세이부와 치열한 순위 경쟁을 펼친 끝에 1경기차로 리그 2위로 올라섰다. 지바 롯데전에서 이라부 히데키를 막아낸 경기 종료 후에 “마쿠하리 해변의 이라부 해파리에 쏘여 버렸다”라는 말을 남기는 등 경기가 끝난 후 자신의 재치와 유머 넘치는 발언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등 큰 화제를 불러일으켜 ‘오야붕’(親分)이라는 단어는 그해 신어·유행어 대상의 ‘대중어 부문·금상’에 선정됐다. 하지만 이듬해 1994년에는 주력 투수와 타자들의 부상이 속출하는 등 악재가 겹쳐 최하위(6위)로 떨어졌다. 5개 구단 모두에게 지면서 타율, 득점, 안타, 타점, 평균 자책점, 실점, 도루 모두 리그 최하위를 기록하여 전년도보다 성적이 크게 떨어졌다. 9월 29일, 홈구장인 도쿄 돔에서의 최종전이 끝난 후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마친 직후 팬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47] 이 해를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동시에 닛폰햄을 퇴단했다.
퇴단 후
1995년부터 프리랜서 평론가, 일본 프로 야구 OB클럽(전국 야구 진흥회) 이사장(2009년 3월까지. 그해 4월부터는 명예 이사장으로 취임),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 위원회 의장, ‘모르츠 구단’ 감독·총감독, 쇼리키 마쓰타로상 선정위원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TBS 계열 프로그램 《선데이 모닝》의 코너 ‘주간 어의견번’(1997년경 시작[48])에 하리모토 이사오와 함께 고정 출연했다. 닛폰 방송 《오하요! 닛폰 전국 소방단》(2006년 4월 시작)에서는 소방 응원단장의 직함으로 게스트로 출연하고 있었다.
2009년 10월에 담낭암 진단을 받아 프로그램 등에서는 투병 중인 상황에서 출연하고 있었다. 2010년 9월 26일과 10월 3일에 2회 연속으로 《선데이 모닝》에 출연하지 않았고 9월 26일에는 자세한 이유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10월 3일에 자신이 보낸 편지를 세키구치 히로시가 소개하여 그 내용 중에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밝혔다. 10월 7일 오전 7시 25분에 담낭암으로 사망했다(향년 78세).
상세 정보
출신 학교
- 가나가와 현립 히라쓰카 공업학교(현: 가나가와 현립 히라쓰카 공과고등학교)
- 가나가와 현립 상공고등학교
- 릿쿄 대학
선수 경력
지도자 경력
- 롯데 오리온스 감독(1971년~1972년)
- 닛폰햄 파이터스 감독(1976년~1984년, 1993년~1994년)
개인 기록
등번호
- 15(1956년~1964년)
- 26(1965년)
- 40(1966년~1967년 도중)
- 57(1967년 도중~1968년)
- 52(1969년~1972년)
- 86(1976년~1984년, 1993년~1994년) ※준영구결번
등록명
大沢 昌芳 (1956년~1961년)大沢 啓二 (1962년~1984년, 1993년~1994년)
연도별 타격 성적
연 도 |
소 속 |
경 기 |
타 석 |
타 수 |
득 점 |
안 타 |
2 루 타 |
3 루 타 |
홈 런 |
루 타 |
타 점 |
도 루 |
도 루 자 |
희 생 번 |
희 생 플 |
볼 넷 |
고 4 |
사 구 |
삼 진 |
병 살 타 |
타 율 |
출 루 율 |
장 타 율 |
O P S |
---|---|---|---|---|---|---|---|---|---|---|---|---|---|---|---|---|---|---|---|---|---|---|---|---|
1956년 | 난카이 | 145 | 439 | 386 | 40 | 100 | 11 | 2 | 4 | 127 | 30 | 18 | 12 | 15 | 3 | 34 | 1 | 1 | 56 | 5 | .259 | .318 | .329 | .647 |
1957년 | 107 | 335 | 296 | 36 | 73 | 9 | 2 | 4 | 98 | 22 | 4 | 2 | 7 | 2 | 30 | 0 | 0 | 40 | 10 | .247 | .314 | .331 | .645 | |
1958년 | 116 | 325 | 290 | 28 | 79 | 10 | 3 | 1 | 98 | 27 | 7 | 5 | 1 | 4 | 28 | 1 | 2 | 45 | 8 | .272 | .336 | .338 | .674 | |
1959년 | 107 | 260 | 242 | 18 | 59 | 6 | 1 | 0 | 67 | 23 | 4 | 4 | 5 | 1 | 11 | 1 | 1 | 23 | 12 | .244 | .278 | .277 | .565 | |
1960년 | 110 | 275 | 251 | 21 | 65 | 10 | 1 | 4 | 89 | 25 | 2 | 5 | 2 | 1 | 20 | 0 | 1 | 41 | 9 | .259 | .315 | .355 | .670 | |
1961년 | 110 | 209 | 190 | 18 | 31 | 5 | 0 | 1 | 39 | 19 | 2 | 1 | 4 | 1 | 13 | 2 | 1 | 30 | 3 | .163 | .220 | .205 | .425 | |
1962년 | 74 | 193 | 170 | 20 | 42 | 8 | 0 | 0 | 50 | 17 | 0 | 3 | 13 | 2 | 8 | 0 | 0 | 26 | 4 | .247 | .278 | .294 | .572 | |
1963년 | 90 | 123 | 106 | 13 | 25 | 2 | 0 | 1 | 30 | 9 | 1 | 0 | 5 | 0 | 11 | 0 | 1 | 14 | 0 | .236 | .314 | .283 | .597 | |
1964년 | 64 | 83 | 73 | 5 | 14 | 0 | 1 | 0 | 16 | 9 | 0 | 0 | 5 | 1 | 4 | 0 | 0 | 14 | 0 | .192 | .231 | .219 | .450 | |
1965년 | 도쿄 | 65 | 79 | 71 | 3 | 13 | 3 | 0 | 2 | 22 | 10 | 0 | 0 | 0 | 3 | 5 | 0 | 0 | 12 | 1 | .183 | .228 | .310 | .538 |
통산 : 10년 | 988 | 2321 | 2075 | 202 | 501 | 64 | 10 | 17 | 636 | 191 | 38 | 32 | 57 | 18 | 164 | 5 | 7 | 301 | 52 | .241 | .297 | .307 | .603 |
연도별 감독 성적
연도 | 소속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승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연령 |
---|---|---|---|---|---|---|---|---|---|---|---|---|
1971년 | 롯데 | 2위 | 130 | 80 | 46 | 4 | .635 | 3.5 | 193 | .270 | 3.77 | 39세 |
1972년 | 5위 | 130 | 59 | 68 | 3 | .465 | 20.5 | 148 | .264 | 4.54 | 40세 | |
1976년 | 닛폰햄 | 5위 | 130 | 52 | 67 | 11 | .432 | 4위·5위 | 107 | .258 | 3.72 | 44세 |
1977년 | 5위 | 130 | 58 | 61 | 11 | .487 | 4위·4위 | 113 | .245 | 3.36 | 45세 | |
1978년 | 3위 | 130 | 55 | 63 | 12 | .466 | 3위·4위 | 131 | .264 | 3.98 | 46세 | |
1979년 | 3위 | 130 | 63 | 60 | 7 | .512 | 3위·4위 | 131 | .266 | 4.09 | 47세 | |
1980년 | 3위 | 130 | 66 | 53 | 11 | .555 | 2위·2위 | 167 | .264 | 3.61 | 48세 | |
1981년 | 1위 | 130 | 68 | 54 | 8 | .557 | 4위·1위 | 126 | .276 | 3.81 | 49세 | |
1982년 | 2위 | 130 | 67 | 52 | 11 | .563 | 4위·1위 | 127 | .266 | 3.63 | 50세 | |
1983년 | 3위 | 130 | 64 | 59 | 7 | .520 | 20.5 | 153 | .275 | 3.82 | 51세 | |
1984년 | 6위 | 130 | 44 | 73 | 13 | .376 | 29.5 | 144 | .259 | 4.98 | 52세 | |
1993년 | 2위 | 130 | 71 | 52 | 7 | .577 | 1.0 | 106 | .259 | 3.37 | 61세 | |
1994년 | 6위 | 130 | 46 | 79 | 5 | .368 | 28.5 | 101 | .252 | 4.62 | 62세 | |
통산 : 13년 | 1547 | 725 | 723 | 99 | .501 | A클래스: 8회, B클래스: 4회 |
- 1971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제
- 1973년부터 1982년까지는 전·후기제로 실시되면서 승차에서의 왼쪽은 전기 순위, 오른쪽은 후기 순위를 표시
- 1984년은 시즌 도중부터 종료까지 61경기를 지휘. 21승 4무 36패(승률 0.368)
- 통산 성적은 실제로 오사와가 지휘를 맡은 경기에서의 성적
각주
주해
출전
- ↑ NHKアーカイブス NHK映像ファイル あの人に会いたい
- ↑ 《TV 스타 명감 2011》(2010년, 도쿄 뉴스 통신사 발행)에 게재된 사망자 목록
- ↑ 가 나 サンデー毎日1981年11月29日号「ザ・ふぇいす ケンカ人生 『来年こそ巨人をぶちのめせ』」p42-p46
- ↑ 오사와 게이지 1985, 11쪽.
- ↑ 가 나 오사와 게이지 1985, 29쪽.
- ↑ 오사와 게이지 1985, 31쪽.
- ↑ 오사와 게이지 1985, 35쪽.
- ↑ 오사와 게이지 1985, 38쪽.
- ↑ 오사와 게이지 1985, 45-46쪽.
- ↑ 오사와 게이지 1985, 52-53쪽.
- ↑ 가 나 프로 야구 삼국지 1992, 120쪽.
- ↑ 오사와 게이지 1985, 63-64쪽.
- ↑ 오사와 게이지 1985, 69쪽.
- ↑ 가 나 오사와 게이지 1985, 70쪽.
- ↑ 오사와 게이지 1994, 107-108쪽.
- ↑ 오사와 게이지 1996, 39쪽.
- ↑ 오사와 게이지 1996, 35쪽.
- ↑ 오사와 게이지 1996, 37쪽.
- ↑ 오사와 게이지 1996, 38쪽.
- ↑ 오사와 게이지 1996, 57쪽.
- ↑ 오사와 게이지 1996, 58쪽.
- ↑ 広瀬叔功著、南海ホークス ナンバ栄光と哀しみの故郷 (追憶の球団)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2014年、p48
- ↑ 오사와 게이지 1996, 80쪽.
- ↑ 職業野球人・大沢啓二4.尾張メモ - 스포니치아넥스
- ↑ 職業野球人・大沢啓二7.元祖親分と魔術師が認めたスーパーサブ - 스포니치아넥스
- ↑ よみがえる1958-69年のプロ野球 別冊ベースボール Part2 1959年編(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2023年4月刊)p48
- ↑ 오사와 게이지 1996, 84쪽.
- ↑ 오사와 게이지 1996, 90쪽.
- ↑ 오사와 게이지 1996, 94쪽.
- ↑ 오사와 게이지 1996, 101쪽.
- ↑ 『野球小僧 12月号 2011』白夜書房、p.174
- ↑ 가 나 “日めくりプロ野球4月 【4月13日】1969年(昭44) 世界初の代走屋・飯島秀雄 デビュー戦で初盗塁”. 《스포츠 닛폰》. 2008년 4월 7일. 2018년 2월 17일에 확인함.
- ↑ 가 나 宇佐美徹也『プロ野球記録大鑑 <昭和11年 - 平成4年>』講談社、1993年、p.716
- ↑ 読売新聞1971年7月24日11面「農人ロッテ監督更迭 後任には大沢二軍監督」読売新聞1971年7月p
- ↑ 読売新聞1971年8月2日11面「ロッテの巨砲大当たり あえぐ阪急、無残な8連敗 粘った粘った-『0差』」読売新聞1971年8月p39
- ↑ 読売新聞1971年8月4日11面「大沢監督、異例の5年契約」読売新聞1971年8月p93
- ↑ 濃厚になった大沢啓二から金田正一へのロッテ監督交代劇/週べ回顧1972年編 - 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2021年5月6日配信、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 ↑ 프로 야구 삼국지 1992, 123쪽.
- ↑ 読む野球-9回勝負-No.8、2015年、P80、主婦の友社
- ↑ 오사와 게이지 1996, 186-187쪽.
- ↑ 오사와 게이지 1996, 188-189쪽.
- ↑ https://web.archive.org/web/20101010034530/http://www.fighters.co.jp/news/detail/1632.html
- ↑ スポーツニッポン2016年7月30日村上雅則の我が道
- ↑ 가 나 다 오사와 게이지(1996), p.217-218
- ↑ 오사와 게이지 1996, 219쪽.
- ↑ 오사와 게이지 1996, 220쪽.
- ↑ 오사와 게이지 1996, 246쪽.
- ↑ 《야큐코조》2010년 12월호 104-107페이지에 게재된 ‘연표로 보는 프로 야구 뉴스와 그 시대’에서 연표의 ‘사회 정세’항목을 참조. 106페이지에 게재된 1987년의 《선데이 모닝》 시작과 세트로 ‘주간 어의견번’ 코너 시작 시기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술돼 있음.
참고 문헌
- 오사와 게이지 (1985). 《男くせえ 話になるが》 [남자 주제에 말이 되지만]. 衆浩センター.
- 오사와 게이지 (1994). 《男の華》 [남자의 꽃]. スタジオシップ.
- 오사와 게이지 (1996). 《球界無頼 こんな野球をやってきた》 [야구계 무뢰 - 이런 야구를 해 왔다]. 슈에이샤.
- 아리모토 요시아키 (1992). 《プロ野球三国志》 [프로 야구 삼국지]. 마이니치 신문사.
외부 링크
- 위키미디어 공용에 오사와 게이지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 (일본어) 개인 연도별 성적: 오사와 게이지 - 일본 야구 기구 (NPB.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