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요 (趙堯, ? ~ ?)는 중국 전한 의 관료다. 고조 의 공신이며, 어사대부 를 지냈다.
원래는 고조의 부새어사(符璽御史)였다. 고조가 혜제 대신 조은왕 을 태자로 삼으려다 결국은 포기하고 조나라 왕에 봉했는데, 나중에 조은왕이 해를 입을 것을 염려했다. 조요는 고조를 모시다가 고조가 즐거워하지 않고 슬픈 노래를 부르자, 여러 신하들 중에서 홀로 고조의 근심의 원인을 지적했다. 고조가 해결책을 묻자 귀하고 강한 신하를 조나라 승상으로 삼도록 진언하면서 어사대부 주창 을 추천했다. 고조는 주창 대신 조요를 어사대부로 삼았다.[ 1] 진희 의 난 진압에서 공적을 세워 강읍후(江邑侯)에 봉해졌다.[ 2]
혜제 치하에서도 어사대부로 섬겼다. 혜제가 죽고 고후 원년(기원전 187 ), 고황후가 정권을 쥐자, 조은왕을 위해 계책을 세워준 것을 고황후가 원망했기에, 처벌을 받고 어사대부에서 면직됐고 작위를 잃었다.[ 1] [ 2]
↑ 가 나 반고: 《한서》 권42 장주조임신도전제12
↑ 가 나 위와 같음, 권16 고혜고후문공신표제4
1 ~ 10위 11 ~ 20위 21 ~ 30위
괴성존후 주설 (21 또는 22)[ 1]
도창장후 주진(23)
염차후(24) 원경(元頃)|원류(爰類)
성경후 동설(25)
유구제후 융사(26)
고성장후 윤회(26)
아릉경후 곽정(27)
광엄장후 소구(28)
하양장후 진연(29)
요이후 공취
31 ~ 40위
비어후 진하 (31)
평도후(32) 패가(沛嘉)|공사희(工師喜)
무강장후 장불식(33)
여려[ 2] 애후 주조(34)
대정후 대야(35)
세제후 여박 (36)
해양제신후 요무여(37)
척구의후 당려 (40)
41 ~ 50위
동무정후 곽몽(41)
고원제후 병천 (41)
악성절후 정례(42)
선곡제후 정의(43)
위기장후 주정 (44)
창무정신후 선녕(45)
강양제후 화무해(46)
곡역헌후 진평 (47)
동모경후 유조(48)
균장후 장평(48)
복양강후 진서(49)
의씨경후 진속
51 ~ 60위 61 ~ 70위 71 ~ 80위
청간후 질중동
강간후 유승(留勝)|강어후 유힐(留肹)
영릉이후 여신
축아효후 고읍(高邑)|고색(高色)
자조단후 적|극주
오제후 양성연
당양애후 손적
영장후 위선(魏選)|위속(魏遬)
장절후 모택
기신광후 진창
81 ~ 90위 91 ~ 100위
순경후 온개
역간후[ 5] 정흑(92)
고릉어후 왕주(92)
무원정후 위거
오방장후 양무
번장후|평엄후 강첨(彊瞻)|장첨사(張瞻師)
분양(장)후 근강(96)
심택제후 조장야(趙將夜)|조장석(趙將夕)(98)
송자혜후 허치
알지절후 풍해감(馮解敢)|풍해산(馮解散)
101 ~ 110위 111 ~ 120위 121 ~ 130위 131 ~ 137위 열외 ※ 번호가 없을 때에는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순서가 내려간다. 이름이나 시호, 봉작의 표기가 《사기》와 《한서》가 다를 때에는 (《사기》의 표기)|(《한서》의 표기)로 쓴다. 이탤릭체는 고조 사후 봉해졌으나 위계가 기록된 경우다.
↑ 《사기》에서는 21위, 《한서》에서는 22위라 한다.
↑ 상제를 피휘해 융려라고도 한다.
↑ 《사기》에는 순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 《사기》에서는 '양하제애후'에 이름은 기록이 없고, 《한서》에서는 '양하제후 기석'으로 기록되어 있다.
↑ 《사기》에서는 봉읍을 마(磨)라 했으나, 《사기색은》에서는 이를 오류라고 했다.
↑ 《사기》에서는 116위, 《한서》에서는 126위라고 한다. 《사기》를 따를 경우, 척새와 순위가 중복된다.
↑ 원래는 항양.